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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자 양궁 국가대표팀(남수현, 임시현, 전훈영)이 2024 파리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8 서울올림픽부터 자그마치 10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관련 기사: 변화무쌍한 바람 이겨냈다... 여자 양궁, 올림픽 단체전 10연패 https://omn.kr/29ll6 )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이 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 양궁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중국을 이기고 우승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이 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 양궁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중국을 이기고 우승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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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수들이 양궁에 강한 이유를 두고 여러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먼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

유소년 선수단만 2천여 명에 달하는 두터운 인적 자원과 직전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라고 해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까딱하면 탈락하고 마는 오로지 실력 위주의 국가대표 선발 과정, 그리고 인맥과 파벌에 흔들리지 않고 실력에 따른 공정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양궁 협회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 DNA에는 명궁의 자질이 전해진다(?)는 '썰'도 적잖다. 중국 후한시대의 한자사전인 <설문해자>가 중국이 한민족을 포함한 동방민족을 일컫는 말인 동이(東夷)를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파자한 사실, 또는 이름뜻 자체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인 고구려 시조 주몽이나 '신궁'이라고 불린 조선 시조 이성계를 언급하며 역시 명궁의 후예답다는 얘기다. 국가 가사조차 "하느님이 bow(영어로 '활'을 의미) 하사"인 나라라는 농담도 봤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격언이 있듯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세계 최고 한국 양궁의 출발은 과연 어땠을까.

청계천 고물상 뒤지면서 창단한 한국 최초의 양궁부
  
 한국 양궁은 고(故) 석봉근이라는 인물에서 출발한다. 사진은 책 <한국양궁30년사>에 실린 사진으로 1965년 제8회 전국남녀활쏘기대회에서 석봉근이 남자부 우승을 차지할 당시의 모습이다.
 한국 양궁은 고(故) 석봉근이라는 인물에서 출발한다. 사진은 책 <한국양궁30년사>에 실린 사진으로 1965년 제8회 전국남녀활쏘기대회에서 석봉근이 남자부 우승을 차지할 당시의 모습이다.
ⓒ 대한양궁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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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양궁은 고(故) 석봉근이라는 인물에서 출발한다. 1923년생인 그는 양궁 외에도 기계체조, 하이다이빙, 배드민턴 등의 타 종목의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할 만큼 체육에 소질이 있었다. 그렇기에 1948년 국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음에도 다시 경희대 체대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 이후 체육교사로 재직한 것일 테다.

석봉근이 양궁을 처음 접한 건 1959년 중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할 당시라고 한다. 그는 배드민턴을 가르치기 위해 장비를 구하고자 청계천 고물상을 기웃거리다가 줄도 없는 중고 양궁 활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 일본인들이 화궁(일본 고유의 활)을 갖고 활쏘기를 하는 모습을 멋지게 보았던 그는 배드민턴 대신 양궁을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며칠 동안 고물상을 뒤졌다. 그 끝에 활뿐만 아니라 화살과 일본어와 영어로 된 양궁 서적도 찾을 수 있었다. 동료 영어 교사의 도움 덕에 양궁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한 그는 재직한 수도여중·고에 양궁부를 만들었다.

그가 한국 최초로 양궁부를 창단한 지 얼마 안 가 1961년 정부는 대한궁도협회에 국제양궁연맹에 가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당시 아시아에서 국제양궁연맹에 가입한 국가는 대만, 일본, 북한이었으니 다분히 북한을 의식한 지시로 짐작된다. 정부의 지시에 궁도계에서도 가입을 위해 양궁 관련 자료를 모으며 양궁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에 석봉근은 궁도협회와 접촉하게 된다.

1962년에는 양궁 애호가인 주한미군 밀란 엘로트 중령이 양궁 보급에 힘쓰는 석봉근의 소식을 듣고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양궁 장비들을 기증한다. 그는 그 장비들을 가지고 대한궁도협회를 방문, 양궁 보급에 적극적으로 노력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협회에서도 1963년 11월 규약을 개정하여, 양궁경기규칙을 채택하고 그 후 협회가 주최하는 전국궁도대회에 반드시 양궁대회도 함께 하도록 장려하면서 석봉근의 양궁 보급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 그는 양궁 활 제작은 물론 양궁강습회 활동, 선수 육성, 대회 개최의 주관, 양궁 지도서의 발간, 양궁 지도자의 양성 등 양궁발전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한 체육 교사의 반석 위에 세워진 한국 양궁
  
 석봉근은 지도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사진은 1970년 당시 국내 최초의 양궁도장인 국제궁도중앙도에서 제자들에게 양궁을 지도하는 모습으로 빨간 원 안의 인물이 석봉근이다.
 석봉근은 지도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사진은 1970년 당시 국내 최초의 양궁도장인 국제궁도중앙도에서 제자들에게 양궁을 지도하는 모습으로 빨간 원 안의 인물이 석봉근이다.
ⓒ 대한양궁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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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석봉근은 교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재직하던 학교마다 양궁부를 창단했다. 성동중·숭인중·서울북중·행당여중·무학여중·서울체고에 양궁부가 창단되어 양궁 1세대를 육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대표적 제자로는 한국 양궁 최초로 금메달을 따낸 LA 올림픽 당시 감독이자 현재 대만에서 '양궁 대부'로 불리는 김형탁 양궁훈련원장과 런던 올림픽 당시 이탈리아 양궁 대표팀 감독으로 이탈리아에 첫 양궁 금메달을 안겨준 장남 석동은 전 양궁 국가대표가 있다.

감독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양궁 종목이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한 1967년 세계척수장애인 체육대회에서 석봉근은 지도코치를 맡은 후 1983년 아시안컵 양궁 국제대회에서 감독을 맡아 4개 종목에서 전부 우승을 안겨주었고 서울 패럴림픽 때도 감독을 맡아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거머쥐었다. 이때 양궁 종목이 생소한 대중을 위해 자비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석봉근은 1993년 타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30년이 흘렀고 한국 양궁은 명실공히 세계 정상의 자리에 있다.

지금의 한국 양궁은 우연히 줄도 없는 낡은 양궁을 발견한 뒤 평생 양궁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한 체육 교사, 그 교사가 남긴 반석 위에 세워졌다고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기사 내용은 관련 논문, 백종선·김진성, <한국 양궁 개척자 석봉근의 생애와 양궁활동>, 한국사회체육학회지 제51권 제1호, 2013 등을 참고한 내용입니다.


#한국양궁#양궁10연패#석봉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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