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다. 우리집 청소년 남매는 에어컨 있는 안방을 차지했다. 거실 에어컨을 종일 틀기엔 부담스럽다는 걸 알 만큼 철이 든 모양이다. 뿌듯하다.
뿌듯해도 그 방에 같이 있고 싶지는 않다. 완벽한 베짱이 모드로 한량이 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에어컨이 있어도 덥다. 애들 배를 넉넉히 채워 놓고 집을 탈출해서 마을버스를 탄다. 버스의 시원한 공기가 뾰족한 마음을 살짝 어루만진다.
여섯 정거장을 가면 시립 도서관이다. 차를 가져가면 편하지만 마을버스를 고집한다. 경기도민 전용 기후소득 카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적립금이 쌓인다. 폰 화면에 뜬 적립금이 뾰족한 마음을 또 다듬어준다.
도서관에 들어섰다. 널찍한 공간을 채운 넉넉한 냉방에 내 마음까지 넓어진다. 곧장 대출불가 책꽂이로 향한다. 인기 많은 책들이라 대출은 안 되지만 관내에서는 늘 읽을 수 있다. 작년에 재밌게 읽은 김부장 시리즈가 3권까지 나왔다.
제목 대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은 '자가'와 '대기업'에 취해 셀프 과대평가를 하다가 곤경에 처한다. 전지적 시점에서 보니 과대평가지만 내가 그 상황이라면 딱히 다를 거 같지도 않다. 타산지석에 저절로 등이 서늘해진다.
정대리, 권사원 편은 내 아이들의 10년 후 같다. 권사원처럼 자기 앞가림을 할까? 아님 정대리처럼 오늘만 살다가 오늘내일 세트로 망하는 선택을 할까. 공포물 못 보는 나는 이런 상상이 훨씬 더 오싹하다. 책을 덮고 3층 노트북 구역으로 올라간다.
지난주에 3층에서 쓴 기사 두 개 모두 오마이뉴스 메인에 올라갔다. 공간이 주는 좋은 기운 때문이라고 믿고 새로운 기사를 시작한다. 반 썼는데 알람이 울린다. 도서관 피서에 취해 애들 굶기는 애미가 될까 봐 미리 맞춰놓았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전기레인지 3구가 뜨겁게 달아올라 저녁상이 차려진다. 체감온도 50도, 다시 탈출해야 한다.
두 번째 탈출은 시립 수영장이다. 강습 끝나기 전에 힘들다며 나가버리는 회원들 덕에 마지막 10분은 거의 개인레슨이다. 4개 레인에 나 혼자일 때도 있다. 힐튼 호텔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본인 수영할 때 전체 레인을 비운다고 했든가. 이정도면 간헐적 패리스 최튼이라 해도 되겠다.
아침부터 폭염경보가 울렸던 날, 깨어있던 15시간 중 덥다고 느낀 시간은 두 끼 식사를 준비하던 3시간 정도다. 나머지 12시간은 완벽하게 시원했다. 그러느라 들인 비용은 마을버스 요금이 전부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보다 싸다.
이만큼 싼 값으로 이렇게 만족스러운 피서를 하는데는 세금이 구축한 인프라 덕이 크다. 대한민국 국민성이 후졌다느니 어쩌느니 해도 이만한 인프라를 누리는 나라에 태어난 게 감사하다.
나 어릴 때부터 친정엄마는 "남에게 욕 안 듣고, 피해 안 주면서 내 속이 편하면 그게 최고 인생이야"라고 자주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최고 인생'까지 가려면 남들에게 좀 부러움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엄마 말이 와닿지 않았다.
SNS에 올릴 만한 화려한 피서지를 보면 쫄보인 나는 카드값이 먼저 생각나서 속이 답답해진다. 답답한 속이 만드는 심리 폭염은 에어컨도 소용없다. 나는 딱 그만큼 깜냥을 가진 사람이란 걸 이젠 받아들인다.
푸른 바다도, 고급 리조트도 없는 시립 도서관과 수영장은 어디 내보일 피서지는 아니다. 대신 내 속이 편하다. 내 하루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맞추는 대신 나에게만 묻는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엄마가 말한 최고 인생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세금은 그 최고를 아주 많이 도와준다. 거듭 고마운 마음이다.
자신이 행복한가 아닌가보다도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나 안 보이나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다. 기준이 남에게 있으면 언제든 스트레스가 생기기 마련이다. 상상만 해도 벌써 더워진다. 그러니 그런 기준 버리고 세금으로 같이 피서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