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의 모임이 우연히도 차례로 잡혔다. 학창 시절과 전반기 교직 시기를 지방에서 보냈던 내가 수도권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16년째.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초반 수도권 적응기는 녹록지 않았다. 수도권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선배들의 얼굴이 왜 그토록 여유 없어 보였는지 실감했던 시간들. 그렇게 정신없이 훌쩍 시간을 보내고 지금 다시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그저 반갑고 감사하다.
결혼과 출산을 비슷한 시기에 해서인지, 매년 이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그때 대화의 주제가 달라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매사 서투름 속에 고군분투했던 각자의 엄마 역할에 대한 고단함이 우선이었다. 커리어 여성과 제대로 된 엄마라는 두 역할 앞에서 우린 늘 시험대에 올랐다. 아이들의 사춘기와 엄마의 갱년기가 만나는 시점, 20년 가까이 살아왔으면서도 계속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 같은 부부 관계의 고민들을 공유하고 위로하는 친구들이 없었다면 어찌 그 모든 시간들을 지혜롭게 헤쳐갈 수 있었을까.
그런데 올해 이 친구들을 차례로 만나보니, 이전에 가족과 일, 시댁과의 관계 등 우리들의 주된 공통 관심사 속에 떠오른 새로운 화두가 있었다.
"너에게 리쥬란을 추천합니다."
"너 울쎄라 좀 해야겠다."
이 나이에 처음 접한 용어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친구들의 친절한 설명으로 '리쥬란'과 '울쎄라'가 얼굴에 직접 영양을 주입하는 미용 시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쎄라'는 유명 여배우가 받았다고 해서 더 알려졌다고 한다. 얼굴 피부에 직접 몇 백 샷을 시술하는 방식이라는 말에 아프지 않냐고 물었더니, "애도 낳았는데 그 정도쯤이야"라는 친구의 답변에 통증의 정도를 예상할 수 있었다.
평소 잘 웃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온화한 인상으로 나이 들기를 바란 것은 좀 더 젊었을 때의 소망이었다. 피부가 얇아서 주름이 많이 지는 피부 타입이라 이미 드리워진 주름은 갈수록 골이 더 깊어져 지금은 거울 볼 때마다 기분이 별로다.
아무리 호의였다고 해도 얼굴 근접 사진을 찍어주는 상대에겐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모난 감정이 솟구친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화를 내시는 친정 엄마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한편, 만날 때마다 젊어지는 듯한 친구를 볼 때마다 사는 게 원만해서 그런가 보다, 내심 부러워만 했었는데, 비결이 다른 데 있었다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 노화는 자연스러운 결과인데 역주행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지' 하고 말이다. 그래도 "나 00 시술받았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게 50줄 친구들의 우정이다.
그런데 올해 내 친구들이 왜 유독 피부 시술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을까? 아마도 50이라는 나이와 무관하지 않을까, 싶다. 나이 50을 전후로 여자의 몸은 완경으로 가는 과정이거나 이미 완경을 겪어 호르몬의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는 시기다. 체온이 하루에 12번도 변한다는 갱년기에 접어들어 열감으로 숙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체온이 오른 건지, 화가 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감정 기복도 심해진다. '사춘기를 이기는 갱년기'라는 말은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니다.
그저 주름 좀 생겼네, 새치가 늘었네, 푸념하던 40대와 완연히 달라진 몸을 체감하는 시기가 이때다. 일 년이 다르게 느껴지던 이전과 달리, 한 달 전 체력과 달라지는 건 예사다. 그런 시기에 민감한 피부의 변화라고 다를까. 어쩌다 한 번 얼굴 팩을 하고 숙면을 취하면 뽀송해지던 시기가 언제였던지. 1일 1팩을 한다는 여동생이나 지인의 말을 들으며 나이 들수록 관리는 부지런함의 영역이구나, 싶다.
시술로 팽팽해진 친구의 피부가 부럽기는 하지만 통각이 일반인보다 높은 편인 나는 아무래도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못하는 일을 대체할 엉뚱한 생각에 빠지는 걸까?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홀대 받고 없앨 수 있는 방법까지 강구하는 주름. 우리 몸에서 주름이 환대받는, 아니 필수인 영역이 있다면 어떨까?
이것은 대뇌 피질의 주름에 관한 얘기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따르면, 대뇌피질은 진화 과정에서 가장 최근에 발달한 구조로서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이것은 진화 과정에서 가장 발달한 인류의 뇌에서 제일 왕성하게 발달되었단다.
이런 대뇌피질의 가장 뚜렷한 구조적인 특징은 크고 작은 '주름'이다. 대뇌피질의 주름 구조는 이랑의 언덕처럼 올라와 있는 뇌회와 고랑처럼 깊이 들어가 있는 뇌구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대뇌피질 표면의 2/3가 고랑과 같이 생긴 뇌구에 묻혀 있단다. 주름을 형성했기 때문에 피질의 표면적을 3배 이상 크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뇌피질이 주름 구조를 갖지 않았다면 인간이 고등 동물이 될 수 있었을까?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이끈 생각하는 뇌의 주름은 이랑이 많을수록, 고랑이 깊을수록 이득이었을 것이다. 이런 대뇌 피질의 주름이 가진 의미를 알고도 이것을 팽팽하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인간이 있을까.
우리 얼굴의 주름도 맥락상 다르지 않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중력이 위로 작용했다면 우린 모두 치켜떠진 눈꼬리를 갖고 있었을지도)와 삶의 희로애락을 슬기롭게 대처하며 지나온 지난 날들의 지혜가 주름의 이랑과 고랑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밉지만도 않다.
예쁜 얼굴은 아니어도 예쁜 표정은 지을 수 있다. 중년 이전의 얼굴은 주변에 휘둘려 만들어졌다면, 이후는 얼마든지 내 의지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도록 살피고 길 터주기(그 길에 걸림돌이 되는 꼰대 안 되기), 자신의 쓸모와 역할을 잘 찾기,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몰입하기, 여유롭게 생각하고 조금 더 웃기... 중년 이후 신경 쓸 일은 피부 말고도 참 많다.
나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내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직하게 나이 드는 것. 리쥬란과 울쎄라가 겁나는 나는 이렇게 주름 관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