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전국의 초·중·고교에 인공지능(AI)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된다. "AI 교과서 세계 최초 도입"이라는 타이틀이 중요했던 탓일까,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확신에 차 있다. 이 장관은 AI디지털 교과서를 3년 안에 전국 모든 학교에서 사용하게 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반면 시민들은 공분했다. 지난 6월말 'AI 디지털 교과서를 유보해 달라' 라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이 5만명을 넘겨 국회 교육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무수한 논란과 비판이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8월 9일 시청 인근에서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측은 학부모 간담회를 열었다.
KERIS 측은 학부모들이 AI 교과서에 대해 가진 오해와 불신을 풀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다양한 학부모 단체 대표들이 모여 각계 의견을 전달했다. KERI 정제영 원장은 그 자리에 참석한 학부모 대표들에게 "학부모님들이 AI 디지털 교과서의 기술적 기능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어 생긴 오해"가 많다고 했다. 또한 "학부모님들의 우려는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 후 실험해 나가면서 보완해야 할 사항"이라고 했다. 학부모 대표 중 "학생의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시기, 실험쥐가 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을 내비친 학부모 단체도 있었다. 이에 정 원장은 AI디지털 교과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피력했다. 나 또한 간담회에 참석한 학부모로서 몇 가지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AI 디지털 교과서가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 이뤄낼 거라는 허상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의 핵심과제로 제시된 것은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이다. KERIS 측에서 학부모 간담회 당시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학생은 맞춤 교육으로 학습의 성공을 경험하고, 교사는 데이터 기반으로 수업을 디자인하며 개별 학생의 인간적 성장을 이끄는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적시돼 있다. AI 디지털 교과서 개요를 보면 학생이 최적화된 맞춤 학습 콘텐츠로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교사의 경험적 데이터에 근거한 학습지도보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AI가 판단한 지도를 더 신뢰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때문에 AI디지털 교과서 도입이 교권의 추락을 야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의 평가보다 AI가 제공한 기준에 따라 학생을 지도할 것을 요구할 수 있으며, 학생도 교사의 지도보다 AI의 튜터의 말을 따르게 될 수 있다.
2020년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진행한 '에듀테크 멘토링' 사업의 사례분석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기초학력이 부족하거나 취약계층인 학생 4만 명에게 멘토 200명과 학습소프트웨어를 지원했다. 이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른 것은 '사람의 개입 양상'이었다고 한다. 멘토 강사가 '학생과 상호신뢰 관계를 형성'한 경우에 학업성취에 성공했고 멘토가 기기 관리자가 되면 실패했다는 뜻이다.
교육의 효과는 상호 신뢰를 바탕에 둘 때 가능하다. 교사의 경력과 노하우는 중요한 인적자산이다. 이를 빅데이터로 대체하는 행태가 진정한 '맞춤 교육'의 전제 조건일까, 갈수록 다원화되고 원자화된 개인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사고하며 대화와 경청, 공감, 상호 호혜 속에서 지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코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행간 속에 놓여진 학생, 데이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학생들의 환경적 심리적 맥락을 아우르며 사례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이 맞춤형 교육의 필요 충분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AI 디지털 교과서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 메타인지의 종말
8월 9일 KERI 측에서 주최한 간담회 자리에서 나는 정 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학습 도구가 편리한 게 학습력 향상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정 원장은 AI 디지털 교과서에 대해 학부모들이 흔히 하는 오해, 스마트 기기 과의존성에 대해 완벽한 오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정원장은 "AI 디지털 교과서에 중독되는 경우는 아예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 교과서 콘텐츠에 중독되는 학생은 없다. 한마디로 재미없고 지겹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상 콘텐츠나 숏츠에 중독되는 이유도 분명하다. 아무 사고도 하지 않고 넋 놓고 있어도 알아서 화면이 지나간다. 뇌에서 사고할 이유도 정보를 처리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란 무엇인가. 지겹고 재미없는 문장을 읽고, 사고하고 독해하며 해석 응용하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공부란 사전도 찾아보고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료를 뒤적이는 일이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펼쳐놓고 필요한 개념들을 추출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 즉 메타인지를 기르는 일이다. 아마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 대부분이 무수한 학습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사의 도움 혹은 스스로 알게 된 자기 자신의 오류, 성향 등을 파악해 자신만의 맞는 공부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도 높은 편이다.
그래서 모든 교육기관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기주도형 학습'이란 학습자가 자신의 학습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 계획을 세우며 학습활동을 수행하고 학습 결과를 평가하는 전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학습 방식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훈련되는 메타인지야 말로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 AI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결 당시에 인류는 AI의 능력에 감탄했지만 알파고가 자신이 바둑을 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점은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메타인지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자 학습을 통해 길러낼 수 있는 최고의 영역이다. 따라서 나는 공부의 도구는 불편할수록 좋으며 지난한 과정의 반복과 훈련 모색을 통해 체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IMF 이후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첨단화된 IT산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문해력, 독해력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나는 현행 교과서도 부실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텍스트가 급격히 줄고 그림과 사진으로 가득 찬 이미지화 된 교과서는 학습자료로 충분하지 않다. 흔히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다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학생 대다수가 참고서나 교사가 제공한 프린트, 사교육업체가 만들어준 화려한 자료없이 공부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오히려 과거에 교과서 내용이 충분했고, 텍스트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 두꺼운 교과서를 읽으며 학생 스스로 사고하고 이미지화하고 개조도나 구조도를 그려보며 학습하던 시절 문해력, 독해력이 좋은 학생이 많았다고 본다. 갈수록 종이책을 멀리하고 텍스트 읽기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판국에 AI 디지털 교과서라는 편리한 도구가 정말 학습력 증진에 도움이 될까? 검증된 기관에서 오랜 기간 교육학을 연구해온 정 원장과 토론해보고 싶은 지점이었다.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에 잠식 당한 시장주의식 교육
한국에 사교육 매출은 24조 원에 달한다. 요즘 학생들마다 장래희망을 스타강사로 꼽는 학생도 많다. 대치동 수학 일타강사가 연간 200억의 수입을 번다. 한국의 사교육 열풍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과열돼 있다. 7월 7일 정 원장이 <전자신문> 최다현 기자와 나눈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수업과 평가 혁신 결과가 데이터로 축적되고 개인 학생의 학습 포트폴리오가 전형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때 수능을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이 입시전형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입시에 활용되는 '포트폴리오'는 여러 가지 사회 갈등을 야기했다. 2019년에 일어난 조국 전 장관 자녀 입학 혜택 논쟁 때 전면에 등장한 것이 입시 '포트폴리오' 이다. 학생의 학술논문 공저자 등록 및 봉사 시간 허위 기재 등의 부작용들이 사회 전면적인 갈등으로 분출되기도 했다. 그 뒤로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포트폴리오 비중은 없어지다시피하고 수업 태도와 자기주도학습을 평가할 수 있는 세부특기전형으로 중심축이 옮겨갔다. 입시 양극화가 극심한 문제로 떠오르면서 이미 많은 대학들이 수능최저등급을 선발 기준의 요소로 반영하고 있는 추세다. 그런 와중에 다시 AI 디지털 서비스 기반 포트폴리오를 말한다는 것은 사교육의 먹잇감을 던져주는 일이다. 요즘 항간에는 학교 수행평가 과제 대행업체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AI 데이터 기반 입시 포트폴리오가 양산할 부작용은 부지기수다.
개인정보 유출 우려 지식재산권 침해
올해도 서울시교육청과 교육부 산하 기관에서 연이어 학생·교원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학생 개인정보의 연계와 활용을 강조하는 맞춤형통합지원, AI 디지털교과서 등을 추진하다보면 개인정보 활용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개인정보 보호 문제가 발생할 가능이 높아진다. AI 디지털 교과서의 상용화는 학생들이 생산하는 데이터가 플랫폼에 탑재되는 것이므로 학생들의 개인정보가 수집될 것이다. AI 디지털 교과서 정책에는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 사용시 프라이버시, 보안, 감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아동의 권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 문제에 대한 보완 기술이나 대안은 없으면서 그저 "사용하면서 보완하겠다" 라는 원론적인 대답은 개인정보 유출과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낮은 민감도와 부족한 인권감수성의 반증이다.
또한 AI기반 쳇GPT의 활용이 상용화됨에 따라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가 심각하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컴퓨터나 디지털 환경에서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까지 포괄해야 하는 교육이다. 하지만 무단복제, 도용, 출처 미표기 등 부작용이 많다. 이미 AI가 산출한 저작물의 저작권 문제로 저작권 협회, 정부, 기업, 소비자 등이 소송을 벌이기도 한다. AI 산출물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제도적 준거 마련과 사회적 합의도 안 된 상태에서 교육혁명이란 이름에 AI디지털 교과서 도입과 수조원에 달하는 예산 사용은 위험한 행보이다.
디지털 약자에 대한 고려 전무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에 반드시 고민되어야 할 문제는 국제문화 학생과 장애인이다. 더불어 난독증, ADHD 등 시대의 병으로 불리는 질환을 앓고 있는 학생들이다. 이들은 느린 학습자와 또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 이러한 학생들에 대한 고려없이 무조건적 전면적 도입은 반드시 디지털 약자 디지털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내년 교육부 예산안이 올해와 견줘 6조 원 이상 감액됐다. 세수 부진으로 초·중등 교육에 할당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며 그 여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AI 디지털 교과서 개발, AI디지털 교과서 교사 연수 명목으로 사실상 민간기업체에 지급되는 예산이 연간 1조 2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급격한 기술혁신이 우리 일상에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역기능도 심각하다. 대부분 주객이 전도되면서 기술이 인간과 노동을 도구화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사회 곳곳에 만연하다. 학부모도 학생도 교사도 모니터와 그래프만 바라보며 서로를 대상화하고 숫자로 서열화 분류화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교육일까? 그것이 진정 교육의 목표였는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