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BTI)가 유행이다. 아빠에게 티냐고 묻는 광고가 있다. 사고-감정(T-F) 형의 차이도 재밌지만, 판단-인식(J-P) 형의 차이도 재밌다. 흔히 판단-인식(J-P) 형의 차이를 여행 스타일로 설명하곤 한다.
7월 말에 속초에서 친구들과 부부 동반 모임이 있었다. 속초에 사는 친구는 엑셀로 짠 여행 계획을 단톡방에 올렸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는 시각과 떠나는 시각 그리고 필요한 예산과 함께 식당은 만일을 대비한 대안까지 적혀 있다.
몇 차례 수정을 거치고 나니 여행사에서 만든 수학여행 계획보다 완벽했다. 이 친구는 보나마나 매우 전형적인 J형이다. 역시나 MBTI를 물어보니 INFJ란다. 친구 덕분에 1박 2일을 알차고 보람차게 보냈다. 무엇보다 아내가 크게 만족했다.
나는 INTP 형인데 매우 두꺼운 대문자 P형이다. 결혼식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기차표도 예약하지 않아서 역무원에게 통사정해서 겨우 표를 얻어 원주에서 청량리역까지 서서 갔다. 그래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며 이해한 맘씨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면 첫날부터 크게 다투었을 것이다. 아내도 소문자 p형이라 잘 참아주는 것이리라.
지난주 부산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J형으로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부산 관광공사 누리집에서 각종 지도를 내려받았다. 특히 구별로 맛집을 소개하는 '2024 부산의 맛'이란 책자가 맘에 쏙 들었다.
먼저 요즘 뜨고 있다는 '해변열차'를 예약했다. 첫날은 숙소가 있는 중구와 영도구를 둘러본다. 둘째 날은 오전엔 해변열차, 오후는 해동 용궁사를 보고 밤에는 해운대에서 야경을 본다. 마지막 날은 광안리에서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 쉬었다가 점심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부산에 왔으니 돼지국밥, 밀면, 아귀찜 그리고 당연히 회도 먹어야 한다. 일정 사이에 맛집을 하나씩 넣는다. 여기까지는 쉬운데 시간 계산이 어렵다. 지도 앱에서 일일이 출발과 도착지를 찾아서 시간을 확인한다. 일단 첫날 계획으로 만족한다.
집에서 중구에 있는 호텔까지 4시간 남짓이다. 처음 계획은 이랬다. 8시 30분에 출발하여 13시쯤 호텔이 있는 중구에서 이름난 '00 돼지국밥'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 먹고 가까운 곳에 있는 감천 문화마을을 돌아보고 호텔에 체크인한다. 저녁은 자갈치 시장에서 회를 먹고 황령산 봉수대로 가서 야경을 감상한다. 나름대로 완벽한 계획이다.
5일, 출발 당일 예상보다 빠르게 돌발 변수를 만났다. 목적지로 정한 '00 돼지국밥' 앞에 도착하니 계획보다 30분 늦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차장이 없다. 급하게 찾은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다 보니 40계단 기념비가 보인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나온 곳이니 잠깐 살펴보고 바로 옆 골목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니 14시다. 재료가 떨어져서 16시에 다시 연단다. 그렇다. 브레이크-타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급하게 맛집 지도를 보니 500m쯤 떨어진 곳에 '00 회국수'가 있다. 그런데 배도 너무 고프고 햇살도 너무 뜨거워 단 100m도 걷기 어렵다. 그냥 40계단 기념비 옆에 있는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 다행스럽게 냉면은 값이 싸고 맛도 좋았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밥 먹으며 지도를 보니 영도에 '흰여울 문화마을'이 새로 생겼다. '감천 문화마을'은 옛날에 보았으니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절영 해안 산책로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첫 번째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땀을 식히고 속성으로 마을을 둘러보고 서둘러 호텔로 입실했다.
여름엔 호텔 방이 가장 좋은 피서지다. 해가 지길 기다려 저녁 먹으러 나갔다. 국제시장 근처에 주차하고 부산극장 아래 포장마차까지 걸었다. 어묵과 떡볶이를 먹었다. 씨앗 호떡도 먹고 꼬치도 먹었더니 간식이 아니라 끼니가 되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회를 먹기 어렵다. 부산극장 건너편 영풍문고에서 책을 보면서 땀을 식혔다.
야경 명소 '황령산 봉수대'를 찍어보니 거리는 12km인데 시간은 50분이 넘게 나온다. 군데군데 차도 밀리고 운전도 쉽지 않은 부산이라 차선으로 용두산 전망대를 올랐다. 야경 사진을 찍기 위해 망원렌즈와 삼각대까지 챙겨서 올랐지만,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제대로 무용지물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돌발 변수의 연속이다. 이럴 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느슨한 계획도 쓸모가 있음을 다시 확인한 하루였다.
6일, 광안리에 있는 '00 재첩국'에서 아침을 맛있게 먹을 때까지는 좋았다. 예약한 해변열차를 타기 위해 '송정역'을 찍고 향했다. 이것도 실수였다. 도착해 보니 역이 너무 번듯해서 실수를 직감했다.
해변열차는 폐선된 선로를 이용한 관광열차이니 옛날 간이역이다. '송정역'이 아니라 '송정정거장'이다. 정확하게는 상호 '해운대 0000 해변열차 송정정거장'으로 검색해야 한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탑승 시각을 놓쳤다. 다행스럽게 모든 역에서 타고 내릴 수 있는 탑승권을 샀기 때문에 재입장하는 사람과 함께 입장할 수 있었다.
해변열차는 아주 좋은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역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 때 오래 기다려야 한다. 굳이 '모든 역 탑승권'을 사지 말고 '2회 탑승권'으로 보고 싶은 역 하나만 내려서 보면 좋을 듯하다. 해월전망대에서 내려서 스카이워크를 걷고 미포정거장에 내렸다. 청사포정거장은 도로 위로 기차가 지나고 너머에 바다가 보이는 풍경으로 슬램덩크에 나오는 장면을 닮았다고 한다.
돌아올 때 내려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타고 내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전망 좋은 카페가 많은 구덕포에 내려서 커피 마시고 쉬다 보니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이때부터 계획을 버리고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다니기로 했다. 계획이 없으니 어긋날 일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
7일, 마지막 날 드디어 아침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영도 남항시장에 있는 '△△ 돼지국밥'인데 아주 맛있다. 아침 먹고 '이기대 해안 산책로'를 향해 달리다 보니 부산항 대교를 건넌다. 아찔하지만 좀처럼 하기 힘든 이색적인 경험이다.
마지막은 남천동에 있는 독립서점을 찾았다. 갑자기 찾은 곳인데 주차장이 '완당'으로 이름난 맛집 앞이다. 서점 주인에게 추천받은 녹차 팥빙수까지 맛보고 부산 여행을 마무리했다.
비록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여행 전에 미리 일정을 검토하고 계획을 세우면 좋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J형의 장점을 품은 P형으로 변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