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신 분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것이 맞는지 고민했다. 오랫동안 마음에만 품고 조용히 묘소를 방문해 왔는데, 지난 6월 반가운 뉴스를 읽었다. 늦게나마 건국포장을 받게 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묻어두고 가신 이야기는 두고, 알려진 이야기만 조금 꺼내놓아도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그분의 생신(1919년 7월 13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묘소를 방문했다.
안미생. 한국에서조차 낯선 이름일 수 있다. 독립운동가 이름을 모두 외울 수는 없으니. 그런데 함께 독립운동했던 이분의 시아버지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듯하다. 심지어 호까지도 유명한 분이다. 백범 김구. 안미생 여사의 시아버지다.
한 분 더 있다. 안미생 여사의 큰아버지도 시아버지만큼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중국인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는 분이다. 큰아버지 역시 호까지도 잘 알려져 있다. 도마 안중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한 안중근 의사가 안미생 여사의 큰아버지다.
안중근 의사에게는 두 동생이 있다. 정근, 공근. 두 분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 안정근 지사가 안미생 여사의 부친이다. 안정근 지사와 친분이 없었지만, 김구 선생은 안 지사 집안이라면 더 물을 것도 없다며 아들 김인과 3살 연상이었던 안미생의 결혼을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자란 딸이 처음 닿아본 독립운동가
수년 전, KBS <1박 2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하얼빈 특집편을 방영했다. 처음엔 그저 얼어붙은 하얼빈에 혹한기 체험이나 하러 간 줄 알았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동선을 따라 거사 당시의 일을 재현해 가며 감동과 재미를 주는 것 아닌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딸은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그 방영분을 보고 또 본다. 언젠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도 품었다. 딸의 버킷리스트에는 독도 방문과 하얼빈 여행이 들어 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은 독립운동 명문가야. 어때, 그중 한 분의 묘소에 찾아가 볼까? 대신, 엄마도 성당에서 가까운 공원묘지만 알고 정확한 묘소 위치는 모르니, 네가 찾아내야 한다?"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은 비석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찾아다녔다. 묘소를 찾아 주는 사이트에는 공원묘지명과 돌아가신 달(2008년 11월)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검색을 통해 미리 생년월일과 영어 이름도 찾았다. 생전 안미생 여사는 수산나(Susanna)라는 세례명을 사용했고 미국에서는 수지(Susie)라는 이름을 애용했다.
성 필립 네리 공원묘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우리 모녀는 모든 정보가 일치하는 예쁜 비석을 찾아냈다.
"Beloved Mother, Grandmother / SUSIE AHN / July 13, 1919 - Nov. 24, 2008 / Always and Forever in our heart"(사랑하는 엄마이자 할머니, 언제까지나 항상 우리 마음 안에 있을 거예요)
공원묘지가 있는 동네는 어째 우리 모녀에게 익숙했다. 집에서 차로 40여 분이나 떨어져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여기는 우리 선생님 집인데?"
아이들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댁이 공원묘지 바로 곁이었다. 그것도 안미생 여사 묘소에 근접한 골목이라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선생님은 1년에 두어 번, 학교 Tri-M(음악우등학생 협회) 회원이나 졸업생을 위한 파티를 집에서 열곤 한다.
덕분에 요즘은 아이들을 선생님 댁에 데려다주는 길에 안미생 지사 묘소에 들르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는 딸에게 말해주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보다고. 안미생 지사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딸이 처음 닿아본 독립운동가가 되셨다.
노스포트에 오기까지
김구 선생의 장남 김인과 결혼한 안미생은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한 인재였다.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자주 옮기며 고된 생활을 하는 중에도 학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3개 국어에 능통했던 임미생은 한국독립단, 임정 비서진 등 특히 임시 정부의 외교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안타깝게도 남편 김인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구 선생 일가가 머물던 중국 충칭의 당시 환경이 너무나 열악해 폐렴으로 고생하다 명을 달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인맥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페니실린을 구해달라는 며느리의 부탁을 김구 선생은 거절했다. 동지들도 고생하는 마당에 아들을 위해 사적인 힘을 쓸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딸 효자가 겨우 네 살 무렵이었고 광복을 불과 다섯 달 앞둔 시점에 김인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해방된 조국을 임시로 통치하던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임정 인사들은 정부 관계자가 아닌 그저 개인 자격으로 미군 수송기를 타고 꿈에 그리던 해방된 고국에 돌아왔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1차 귀국진에 안미생도 있었다. 귀국 후 때로는 김구 선생의 비서로, 때로는 손님을 맞는 안주인으로, 여성운동과 교육에 앞장선 사회운동가로 3년여간 활동했다. 안미생의 알려진 행보는 여기까지이다.
1948년 전후로 안미생의 행보는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미국 뉴욕에 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모두 가려져 있다.
1949년 3월, 귀국하지 못한 형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돌보며 공적인 활동을 이어가던 부친 안정근 지사가 별세하자 안미생은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가 부친의 장례를 치렀다.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을 때 장례 참석차 미국에서 오고자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뜻을 접고 애석한 마음을 전보로 전했다고 한다. 1965년 즈음, 한국에 남아있던 딸 효자를 미국으로 불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뵙는 참배객이 있었으면
미국 뉴욕의 중심부 맨해튼 동쪽의 큰 섬 롱아일랜드 북쪽 해변에 노스포트라는 지역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한인은 거의 살지 않았다. 한국의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안미생 지사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로 생활했다. 묘소가 있는 성 필립 네리 공원묘지도 노스포트에 있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딸 김효자 여사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롱아일랜드 남동쪽 해안의 오크데일에 위치한 다우링대학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대학 설립자 다우링의 동상이 김효자 여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다우링대는 2016년에 폐교되었지만 찾아가 봤다. 다행히 캠퍼스는 담도 없고 지키는 이도 없어 편히 둘러볼 수 있었다. 혹시라도 김효자 여사의 작품인 설립자의 동상이라도 보일까 교정을 둘러보았지만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름답고 조용한 해안 마을에는 이대로 폐교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대학 건물들이 쓸쓸히 서 있었다.
수지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살았던 안미생 지사에게 미국에서 이룬 가족이 있다. 애써 찾으려 노력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들이 겹치고 안 여사 묘소가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족분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알게 된 듯싶다.
지난 2년간, 어쩌다 찾아보게 된 오래된 지역 신문에서, 어쩌다 나눈 친구와의 대화에서, 어쩌다 가입하게 된 사이트와 어쩌다 보게 된 영상과 잡지에서 자꾸만 안미생 지사와 가족의 흔적을 얻게 되었다.
잠시 남쪽의 다른 주에 살기도 했지만 안 지사는 롱아이랜드 노스포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지역 언론에서 아티스트로 일하기도 했고 중국계 신자가 많은 성당에 다니며 중국계 커뮤니티와도 친밀히 지냈다. 홀로 아들을 멋지게 키웠고 다정한 손녀도 있다. 그 손녀가 남긴 짧은 고별사가 안 지사 묘소를 참배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주었다.
2022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은 안미생 여사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행방을 알 수 없어 전하지 못하다가 올해 초 딸인 김효자 여사에게 연락이 닿아 건국포장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장군의 유지가 있었다. 김신 장군의 딸인 김미 백범김구기념관장과 사위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부단한 노력 끝에 김효자 여사 가족과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6월 25일, 김효자 여사의 뜻에 따라 딸인 자넷 부부가 귀국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훈장 기증식을 가졌다.
여름볕에 묘비가 반짝이고 있었다. 딸아이가 그 앞에 해바라기 한 송이를 놓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고 이제는 가족 가까이에서 영면에 들어간 분의 삶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이제는 애국지사가 되신 분을 다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뵙는 참배객이 더러 있으면 좋겠다. 생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분들이 광복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땅히 받아야 할 깊은 감사와 존경을 다 받지 못하는 듯 해 속상한 마음이 크다.
안미생 지사님.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가끔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브런치에 함께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