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성당 제대 뒤 벽 마감재에 가려져 있던 벽화가 50여 년 만에 발견돼 복원을 거쳐 제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교구 총대리 한정현 스테파노 주교는 11일 삽교성당에서 기념 미사를 거행하고 복원된 제대화를 축복했다.
복원된 제대화는 지난해 9월 성당 내부 벽면 페인트 작업을 위해 도색을 제거하던 중 십자가가 달려 있던 제대 벽면의 갈라진 틈으로 채색된 벽화가 보이면서 발견됐다.
최일현 삽교성당 주임신부에 따르면 제대 뒤 벽 도색 공사를 앞두고 점검 중에 갈라진 벽체를 건드려 보니, 흰색 마감재가 떨어져 나가고 그 밑에서 화사한 빛깔의 물감층이 드러났다.
최 신부는 "(과거) 사진으로 미뤄볼 때 1974~1978년 12월 사이에 벽화가 완전히 가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내포교회사연구소와 인천가톨릭대학교 정수경 교수에게 조언받은 결과, 1968년 작품으로 희귀성과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최 신부는 보수공사를 중단하고 복원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군 관계자는 "벽화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꽤 있었다. 한 신자의 혼인성사 가족사진 배경에 흑백이지만 제작 연도와 작가의 서명도 보였다"며 "인천가톨릭대학교 정수경 교수에게 연구용역 의뢰 결과, 벽화의 서명을 통해 작가가 프랑스 출신 앙드레 부통(Andre Bouton, 1914~1980) 신부라는 사실과 제작시기(1968년 11월 11일)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이었던 부통 신부는 한국 체류 10년 동안 국내 여러 성당과 공소 등지에 수십여 벽화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경상도 권역에서 발견됐고, 대전교구에는 대흥동성당이 유일했는데, 부통 신부가 남긴 벽화 중 규모가 가장 큰 작품이 이번에 삽교성당에서 발견됐다.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매달린 예수를 중심으로 화면 오른쪽에는 창을 들고 서 있는 로마 병사가 있고, 그 바로 옆에 비통하게 흐느끼는 여인이 배치돼 있다. 왼쪽에는 고통받는 예수를 위로하는 여인이 보이고, 옆으로 제의를 입고 성작과 성체를 든 사제의 시선이 회중을 향해 있다.
십자가 위로 하느님(성부)이 십자가를 양손에 떠받친 채 비둘기(성령) 한 마리가 예수를 향해 있다. 인류의 죄와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은 예수가 구원의 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군 관계자는 "벽화의 실체를 확인한 삽교성당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어 복원할 필요가 있다"며 "복원 지원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복원 비용 4600만 원(연구용역비 1200만 원, 복원비 3400만 원)을 지원했고, 정 교수에게 의뢰해 복원을 추진했다.
복원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복원작업은 먼저 마감재 제거를 위한 약품 테스트를 시작으로 일부 벽화 조각과 마감재 성분을 삼성미술관 분석실에 의뢰해 물감 성분과 마감재 재료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비계를 설치한 뒤, 플라스틱 스크레이퍼와 붓 등을 이용해 마감재를 제거했고, 잔재물은 물과 흡수성 스펀지를 이용해 처리했다. 박리·박락된 부분 등은 보존용 접착제를 이용해 보강했고, 균열 부위는 벽화에 적합한 메움제를 사용해 메워주고 색 맞춤을 했다.
복원을 지원한 군은 앞으로 제대화의 충남도 등록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기로 하고 올해 말 전문가 자문을 통해 구체적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최재구 군수는 "삽교성당 제대화처럼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예술 작품 복원을 지원하고 지역 문화유산 보호에 기여할 수 있어 기쁘다"며 "향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삽교성당이 복원한 것, 벽화 뿐일까 |
삽교성당 제대 뒤 벽화가 50여 년 만에 복원돼 화제다.
천주교를 연상할 때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릴 제대 뒤 대형 십자가상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아쉽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희귀·예술성을 지녔다는 벽화가 반세기 넘게 가려져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제대화가 그려진 시기가 가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막 끝난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야 한국인 신부가 모국어로 드리는 가톨릭교회의 미사가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럽지만, 196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천주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가톨릭교회의 전통) 전통에 익숙해 있었다.
미사에 참석하러 온 한국인 신자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미사경문을 읽는 사제를 마주해야 했다. 제대 뒤 벽은 고통받는 예수를 형상화한 커다란 십자가가 당연히 자리하고 있어야 했다.
삽교성당이 건축되기 3년 전까지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는 정신(쇄신·적응)으로 그때까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왜곡된 그리스도교 전통과 구습을 걷어내기 위한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
당연한 줄 알았던 라틴어 미사와 제대·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모습과 결별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합의한 회중 중심의 미사 전례가 자리 잡기까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가톨릭 국가들은 과거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으레 개혁가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 앞에서 겪는 통과의례였다.
가톨릭교회에서 변방이자 여전히 선교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천주교회 역시 로마에서 일기 시작한 변화를 일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포교를 통해 신자들을 모아야 했고, 그렇게 모인 신자 공동체를 위한 교회를 신축할 일이 많았다. 동시에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재발견한 초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해 새로운 전례를 안착시키는 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부과된 중요한 과제였다.
1967년에 건립된 삽교성당 역시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천장에 직사각형의 성당 평면을 바탕으로 한쪽 끝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를 놓고 나머지는 신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앙드레 부통 신부다. 그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 신부였다. 베네딕도 수도회 신부들은 공의회가 회중 중심의 전례 개혁을 논의하기 반세기 전부터 선교지였던 한반도에서 제대를 중심으로 한 미사전례를 시도했다.
수도회는 선교지에서 새로운 시대사조를 소개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1960년대를 거쳐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통치에 숨 막혔던 시절, 수도회가 운영하는 분도출판사가 펴낸 책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분도출판사는 이해인 수녀의 서정적인 시집·수필집과 <꽃들에게 희망을> 등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부터 해방신학이라는 낯설면서도 파격적인 사상을 접하는 통로가 됐으며,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숨통을 틔게 해줬고 척박한 땅에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청년 김지하(프란치스코) 시인의 시집은 분도출판사의 인기 서적이기도 했다.
베네딕도 수도회 전통에 녹아 있던 부통 신부는 여전히 선교지에 머물러 있던 한국천주교회에 자신의 예술적 역량으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삽교성당 제대화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찰해 재발견한 초대 그리스도교회 정신을 담고자 했다.
대형 십자가 대신 제대 뒤 벽을 벽화로 장식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이 더러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어느 해 삽교성당에 새로 부임한 신부 역시 제대 뒤는 당연히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어야 했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부통 신부가 그린 수십여 작품 가운데 대부분이 소실돼 사라졌던 이유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이번에 복원된 삽교성당 제대화도 현재 본당신부가 벽화의 가치를 알아봤기 망정이지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부통 신부가 시도한 새 전례 정신이 50여 년 만에 개화한 느낌이다. 오래된 벽화의 복원 이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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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