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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제발, 에어컨 좀 틀자!"

며칠 전 코로나 확진을 받고 방에 격리되어 있던 남편이 마스크를 쓴 채 방 밖으로 나왔다. 새벽 1시, 창문을 열었지만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우리 집은 오전은 가급적 선풍기로 버티고, 오후 3시경부터 에어컨을 틀었다가 밤 12시경에 끈다.

아이들이 방학 중이었을 때는 점심 식사을 준비하는 오전 11시경부터 에어컨을 틀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개학을 했기에 하교 시간쯤부터 에어컨을 트는 것이다.

끝날 줄 모르는 폭염, 양산 소용없어요 끝날 줄 모르는 폭염이 지속되는 2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
▲ 끝날 줄 모르는 폭염, 양산 소용없어요 끝날 줄 모르는 폭염이 지속되는 2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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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에 아이들도 밤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모양새다.

내내 에어컨을 틀다 보니 이번 달 전기세 나올 것이 무서워 다시 에어컨을 선뜻 틀지 못하는 나 때문에, 가족들이 집안 곳곳 시원한 바닥을 찾아 이불을 들고 잠자리를 옮겨 다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결국 각자의 방이 아닌 딱딱한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등을 대고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오늘로 열대야 33일째란다(서울). 1994년 최악의 폭염이라던 그 해의 열대야 일수 36일이 코 앞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일수를 올해는 거뜬히 넘길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지치게 하는 요즘이다.

최악 폭염, 1994년의 기억

1994년 여름. 최악의 폭염이었고 열대야 일수마저 36일로 최장기간이었다는 그해, 우리는 어떻게 여름을 지났던가? 그때 내 나이 열다섯이었고 가장 예민한 시기였던 중학교 2학년이었다.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6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생활했으니, 그 더위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했을 것이다.

집에서 싸 온 얼음물은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다 녹기 일쑤였고, 너도나도 부채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서 차가운 물로 손수건을 적셔와 머리에 올리거나 목덜미에 걸어두고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들이라고 안 더웠을까? 선생님들 또한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수업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친구는 집에서 가져온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수업을 받기도 했다(다들 웃어 넘겼다). 더위가 극심했던 어느 날에는 아예 단축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을 기억하는 내 머릿속의 나와 친구들은 왜 모두 웃는 얼굴인 걸까? 더위 때문에 단축수업을 했지만, 우리는 집으로 곧장 가지 않았다. 하굣길에 학교 앞에 즐비했던 분식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이다.

에어컨, 선풍기는커녕 길가에 서 있는 포장마차에서 실시간으로 요리되는 떡볶이와 튀김류와 어묵탕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그곳에 머물렀고,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우며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뜨겁디뜨거운 분식을 나눠 먹었다.

폭염을 잠시나마 달래줄 소나기. 우리의 올라간 온도를 식혀줄 소나기와 같은 서사가 필요하다.
▲ 폭염을 잠시나마 달래줄 소나기. 우리의 올라간 온도를 식혀줄 소나기와 같은 서사가 필요하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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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우리에게 더위가 뭐 그리 대수였을까 싶다. 건강할 때이기도 했고,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이 터질 때였으니. 더위는 그저 여러 웃을 이유 중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때처럼 마냥 웃지 못할 이유가 많다. 이웃들을 만나도, 뉴스를 봐도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무더위에 '무탈하시라'는 인사말은 너무 당연한 게 되었고, 기후 온난화에 대한 경고는 우리를 불안의 우물안에 가둔다.

다시 돌아온 코로나 유행은 지친 몸과 마음에 무게를 더하고 있으며, 언젠가 안정될 줄 알았던 물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심판론을 제기했던 정당들이 국민 대다수의 선택을 받았고 무언가 일이 해결될 것만 같았지만, 진행되는 양상은 지지부진해보인다.

정부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욱 민심과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더위에 지치고 삶에 지치고, 게다가 불의함에 지치는 요즘이다.

이렇듯 우리가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몸을 덥게 하는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마음을 덥게 하는 내적인 더위가 외적 더위와 합쳐져 우리의 온도를 계속 상승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지치게 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순간을, 하루를, 매일을 견뎌낼 수 있을까?

소나기가 폭염을 잠시 달래고 시원함을 느끼게 하듯이, 우리의 마음에 올라간 온도를 식혀줄 시원한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한 발짝 나아갈 거라는 희망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지난 22일이 처서였다. 곧 이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감염병이 통제되고, 물가가 안정되며, 불의함이 심판을 받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게 느껴지는 이런 바람들이 그나마 지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게 아닐까.

비정상적인 기상(氣像, 날씨)이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그 무게와 맞짱 뜰 만한 기상(氣像, 기개나 마음씨)으로 웃음을 지켜낼 수 있길 바란다.

간밤에 선선한 바람길을 찾아 등댈 곳을 찾아다니다 기상(起床, 자고 일어남)한 가족들에게 '잘 잤어?'라고 웃으며 인사할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올여름을 회상하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기상(氣相, 낯빛)이 밝고 환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폭염#열대야#내적더위#희망#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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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 7권의 웹소설 e북 출간 경력 있음. 현재 '쓰고뱉다'라는 글쓰기 공동체에서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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