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살아왔다.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우수한 문화를 창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를 지나 단군 아사달에 도읍을 거쳐 고조선과 주몽의 고구려 건국으로 이어진다.
그 당시 생활 풍속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에 나타나듯, 역사 속의 차문화는 고구려의 구다국(句茶國)이라는 지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茶)자란 지명으로 보아 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차를 마시고 즐긴 모습도 그려져 있다. 출토된 벽화에서 선조가 죽으면 부장품으로 차가 넋을 기리는 데 쓰였던 것으로 보아 귀히 여긴 음식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고려 충열왕이 김해 금강사에 왔을 때 뜰 앞에 있던 산차(山茶) 나무 모습에 반해 장군수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신라 30대 문무왕은 조서를 내려 해마다 김수로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하는데, 이때 이 차도 함께 올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장군차를 황차, 또는 죽로차라고 부르며, 김수로왕의 찬란한 금관가야 건국은 우리의 차를 이어오게 하였다. 김해 백월산의 죽로차는 허황후가 차씨를 인도에서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차 시배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7) 때에 차를 들여와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던 어느 스님이 차 씨를 들여와 하동 쌍계사 근처에 심었다고 하며, 또한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신라 흥덕왕(828) 때 당나라에서 귀환한 사신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왔는데, 왕이 그것을 지리산(남록)에 심게 하여 하동 쌍계사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교각스님이 중국에 신라 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당에서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긴 시간 차이가 있음을 보아 우리 차가 분명히 먼저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시대 성왕은 일본에 불구(佛具)와 차(茶), 향(香), 등은 육법공양을 담혜화상과 스님들을 통해서 보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신라시대엔 육신보살 지장법사 김교각(705~803) 스님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를 만들었는데, 중국불교에 전설적인 업적과 영향을 끼쳤다고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에 적고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시대에는 찬란하고 화려한 문화가 꽃을 피웠는바 불교문화와 차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다. 특히 이규보, 원감국사, 정몽주, 진각국사 혜심 스님은 화순 사람으로 이름난 차인들이며, 다방, 다군사, 다소 등의 제도를 만들었고, 청색을 좋아해 맑고 명랑한 비색을 지닌 천하제일의 고려청자가 발달하였으며, 차문화의 절정을 이루어 팔관회와 연등회 등 국가 제의에서 제주와 차가 공통으로 사용되었음을 <고려사예지>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억불 숭유정책으로 사찰의 쇠락과 다풍이 사라졌으나, 조선시대 후기가 되어 다시금 차문화가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차는 물질과 정신의 가교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쓰이는 '다반사'란 말이 보여 주듯이 선조들의 삶속에는 제례나 국사 등 큰 행사에서는 꼭 차가 쓰였다. 그리고 각종 모임과 담소 등을 나누고자 할 때에도 차를 곁에 두고 애용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선비다례의 맥을 이어준 신라시대의 화랑도 정신은 바로 다도정신으로 나라를 지켰다고 이곡의 <동유기>와 <동국여지승람>에 적고 있다. 이는 곧 한국문화의 정신은 차의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차는 곧 우리의 정신이며 문화의 성격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문화였다. 차를 두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였으며, 차는 한자문화권이 이룩한 미학적 특징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전기에는 사원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후기에 이르러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등 유수한 다인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 우리 다도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초의선사는 동양 고유의 차문화를 정리하고 한국 차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설파하였다. 아름다운 차를 신성시하고 자주 즐겨 마시는 등 한국 차의 기원을 세우게 된다.
다성이라 추앙받고 있는 초의선사는 차의 신명인 다신을 좇아 차와 선을 한 가지라 하였다. 차를 마시는 일을 선의 경지로 끌어 올려 다선삼매(茶禪三昧),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에 들곤 하여, 당대 최고의 선지식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서성(書聖) 추사 김정희와는 동갑내기로 평생 마음을 열고 지냈으며, 추사는 수시로 초의에게 차를 부탁했고, 초의는 손수 정성을 다해 차를 만들어 보낸다. 또한 추사의 제주 유배지까지 찾아가 차를 나누며 살폈다고 추사 전집에 전한다.
지리산 칠불사와 대흥사 일원, 그리고 일지암은 한국다도의 중흥을 일으킨 곳임과 동시에 초의선사가 주석하시며 선과 차를 수행으로 삼아 <다신전>과 <동다송>을 연구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수십년간 해박한 지식으로 시대의 문인 묵객들과 불법(佛法)을 논하며 폭 넓게 교유했다. 뿐만 아니라 차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차를 재배하여 키우고 법제하여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였던 것이다.
<다신전>은 초의선사가 43세 때 한국 차의 근원지인 지리산 화개동 칠불암 아자방에서 차를 제대로 마시는 법을 알리고자 저술한 명저이다. 청대의 모환문이 엮은 백과사전 같은 <만보전서> 중의 <다경채요>를 초록하였으며, 시자인 수홍이 1830년 핵심과 정수를 뽑아 정서하였다고 전해진다.
<동다송>(1837)은 그 뒤 52세 되던 해에 쓰여 진다. 1824년 일지암을 지어 수행하고 있을 무렵, 정조대왕의 사위인 해거도인 홍현주가 진도부사인 변지화를 통해 초의선사에게 다도에 관해 물어오기에 그 청을 받아들여 답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오늘날 불후의 고전이자 한국의 다경이라 일컬어지는 <동다송>은 한국의 다인들이라면 누구나 제일먼저 만나게 되는 명저 중 하나이다. 즉, 2000년이 넘는 차문화와 역사를 지닌 동다(東茶), 즉 우리의 차를 칭송한 차와 다사(茶事)에 대한 글이며, 자연과 인간 생명에 대한 예찬과 사색이며 명상서이다.
또한 우리차가 지닌 색향기미(色香氣味)의 우수성은 결코 중국차에 뒤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저술이다. 그리고 <동다송>은 차의 덕을 칭송한 시 형식의 문체이며, 동다가 최고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즉, 동다송은 한국 차의 다경으로써 높이 추앙받는 차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차 전문서이다. 우리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바른 차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완도차밭 청해진다원 교무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