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아주 예전에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꽤 근사한 놀이공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놀이공원은 김갑희 할아버지가 생전에 버려진 폐품을 직접 가져다가 자르고, 붙이고, 색칠해서 만든 것이었다. 공원 안에는 커다란 연못도 있고, 연못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있고, 역시 직접 만든 공연무대도 있었다. 한창 때는 원숭이, 원앙, 칠면조 등 37종류 동물들을 키우기도 했다.
1991년부터 조금씩 만들기 시작한 이 놀이공원은 2007년 무렵엔 꽤 이슈가 되면서 할아버지는 다양한 방송에도 출연했고, 당시 <오마이뉴스>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기사 보기:
"무엇이든 내 손 거치면 근사해진당게"-김갑희 할아버지의 예쁜 '노로(老路)공원' http://bit.ly/zr55U )
당시 인터뷰에서 김갑희 할아버지는 제 손으로 이것저것 '맹글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원에 놀러 온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게 재미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그 사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지난 2021년 고인이 돼셨고, 그 옛날 놀이공원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은 채 먼지만 뒤덮여 쓸쓸하게 남아있다(잡초가 무성한 채로 부지만 남아있다고 한다).
최근 오랫동안 잊힌 이 놀이공원이 다시 살아났다. 김갑희 할아버지의 외손녀인 작가 '양선'씨의 창작동화 그림책 <할아버지의 특별한 놀이공원>을 통해서다(2024년 8월 발간, <미디어창비>출판사).
이 작품에서도 할아버지의 놀이공원은 한때 눈부시게 빛났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낡고 바래면서 결국 쓸쓸히 사람들로부터 잊히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 놀이공원은 이내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품은 씨앗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아버지가 놀이공원에 심었던 앵두나무가 자라서 다시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김갑희 할아버지를 둘러싼 현실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할아버지의 놀이공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겠지만, 그래서 할아버지가 놀이공원을 만들기 위해 쏟았던 노력과 정성과 마음이 다 쓸데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공원은 17년이 지나 양선 작가의 손을 통해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만들어졌다.
이제 이 놀이공원은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감동으로 사람들에게 닿을 것이다.
지난 21일 <할아버지의 특별한 놀이공원>의 양선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를 1문1답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쓴 편지와도 같은 그림책
- 동양화를 전공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림책 작가가 되었는지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걸 따라가다 보니 거기에 그림책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마다 언어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가진 언어가 그림책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조잘조잘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걸 긴 호흡으로 풀어쓰기보다는 우화처럼 이야기로 만들고, 거기에 그림을 입혀 보여주는 게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대학원 다닐 무렵에 논문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찌 보면 그림책이라는 '딴짓'을 했던 거예요. 그렇게 작품 하나를 완성했고, 이참에 거절당하는 연습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출판사에 투고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연락을 주셔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 최근 신작 <할아버지의 특별한 놀이공원>을 출간했는데요. 어떤 책인지 저자가 직접 소개해 주신다면요?
"어떤 날, 우연히 오래된 앨범을 들여다보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때 마치 기억 속 서랍이 열리던 기분이었어요. 거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제 외할아버지의 놀이공원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것, 동시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 지금은 사라져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걸 바탕으로 다시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싶었습니다. 꼬마 독자들이 봐도 좋겠지만, 어른들이 봐도 좋지 않을까요. 어른들도 자신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 사진을 발견했다는 것과, 그 사진을 매개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 그렇게까지 매료되었을까요?
"저도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는 그냥 추억에 젖어서 '이때 참 예뻤었지...' 하고만 넘겼어요. 그러다 어느 날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았는데요, 영화에 등장하는 파라디소 극장이 한때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다가 시간이 흘러 낡아지면서 결국 폭파하게 되잖아요. 마을 사람들이 폭파되는 극장을 보면서 누구는 울고, 누구는 감상에 젖는데, 왜인지 제게 이 장면이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치 외할아버지의 놀이공원이 나의 파라디소 극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서 만들어보자, 하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 저는 만약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가진 땅과 전 재산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한 무료 놀이공원을 짓는다면 응원보다는 원망의 마음이 컸을 것 같은데요, 작가님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사실 가족들은 그때 공원을 안 좋아하셨다고 들었어요.(웃음) 놀이공원을 만드는 일에 매진하느라 농사일도 거의 할머니가 하셨다고 들었거든요. 다만 돌아보면 저희 아버지가 외할아버지랑 비슷한 점이 많으신 것 같아요.
이를테면 얼마 전에 아버지께서 네잎클로버를 잔뜩 찾아서 말린 다음 찍어서 눌러 놓았으니, 다음에 볼 때 주겠다고 하셨어요. 주변에 선물로 나눠주라면서요. 외할아버지처럼 선한 주관과 낭만이 있는 분이세요. 엄마가 결국엔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분을 만나 결혼하신 걸 보면 실은 꽤 좋아하셨던 거 아닐까요?(웃음)"
- 할아버님이 이 책을 보신다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가족에게 편지를 썼던 적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의무감으로 너무 대충 써서 할아버지께 드렸는데요, 그런 편지를 가지고도 할아버지는 정말로 감동받았다며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때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특별한 놀이공원>은 그때의 죄송함을 만회하고자 저의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담아 할아버지께 쓴 편지와도 같아요. 아마 살아계실 때 이 책이 나왔다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감동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 작업 얘기를 좀 해보죠. <할아버지의 특별한 놀이공원>은 그림에서 나무 향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작들과 비교해 보면 그림의 결이 좀 다른 느낌인데 의도한 지점인가요?
"네. 맞습니다. 저는 작품마다 이야기에 어울리는 분위기나 색감 등을 새롭게 써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주변에서는 전체 그림체를 보면 저만의 감성이 느껴진다고도 하는데, 저는 그런 저만의 느낌을 유지하되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번 작품도 처음엔 콜라주 형식으로도 했다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엎기도 했고, 손목이 거의 갈려 나갈 정도로 샘플 드로잉도 많이 했어요. 결국 콜라주와 기존에 했던 작업의 중간 정도의 느낌으로 먹과 안료를 가지고 그리는 기법을 통해 독특한 질감을 입히는 방식으로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정하기까지 아마 수백 장은 버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할아버지처럼 나이 들어간 놀이공원을 그릴 때 가장 많은 공을 들였어요"
- 2022년에 데뷔한 신진 작가이신데, 매년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출판사들의 인정도 필요하겠지만, 일단 작가님의 작업 속도도 일반적인 그림책 작가들보다 매우 빠른 편인 것 같습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요즘 생각한 건데 제 원동력은 결국 사람인 것 같아요. 책이 나오면 무슨 색 리본으로 포장할까. 어떤 굿즈를 만들까? 사람들은 어떻게 읽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동기부여가 됩니다.
가끔 매너리즘에 빠질 때면 어린이 독자들의 리뷰나 메일을 읽어보기도 해요. 그러면 마음이 울렁거릴 때가 있습니다. 카페에서 리뷰를 읽다가 너무 감동해서 캡 모자를 내리고 엉엉 울기도 했다니까요.(웃음) 그러다 보면 결국 스스로에게 말하게 되죠. '양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그림을 그려야 해!'(웃음)"
- 스토리에 관한 영감은 어디서 얻으세요?
"저는 영감이 대단한 것에서 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영감은 결국 나에게서 시작하고, 별것 아닌 듯한 장면들에서 오더라고요. 샤워하면서 하는 잡생각이나 친구와의 수다와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 많이 찾는 편입니다.
언젠가 제가 악몽을 연달아 꾼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는데요, 나름대로 극복해 보려고 밤을 의인화시켜 '밤'과 함께 '밤'을 여행하는 상상을 했어요. 밤에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도 한 장씩 그렸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고, 밤이 포근하게 느껴지면서 그렇게 무서웠던 밤이 저를 안아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만들어진 책이 <달님이랑 꿈이랑>이에요. 따지고 보면 그 악몽 덕분에 스토리의 영감을 얻었던 셈이죠."
- 이번 책 작업하면서 가장 공들여 그린 장면, 혹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무엇인가요?
"어릴 적부터 '오래된 공간'이 주는 느낌을 좋아했어요. 공주님이 사는 멋지고 번쩍번쩍한 성보다 무너지기 직전의 덩굴이 뒤덮여있는 낡은 성에 사는 공주에게 훨씬 더 끌려요.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을 보면 어떤 역사와 이야기가 스며들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책에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놀이공원보다는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처럼 나이 들어간 놀이공원을 그릴 때 가장 많은 공을 들였던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세상 모든 것들은 다 변한다고 하죠. 그래도 이 책에 나오는 앵두나무처럼 이 이야기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우연하게 이 책을 보실 독자님들의 마음에 착 앉아서 아름답게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감사한 일들이 정말 많았어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하지만, 이 감사한 마음만큼은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