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북한 주민을 인터뷰 한 외국 매체의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말하자면, 기자가 "당신이 평생 딱 한 곳만 가볼 수 있다면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싶나요?"라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 주민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리 인민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쯤은 세계 최강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만국 공통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그랬다. 그래서 지난 5월,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버킷리스트의 달성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우호국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미국을 여행할 때에 비자(VISA)를 받을 필요가 없이 비자면제 프로그램(ESTA)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말만 면제이지, 2시간 가량 컴퓨터 앞에서 호구 조사를 거쳐야 하고, 통과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무비자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간혹 입국이 거절된 사례들도 계속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추방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입국 심사 예상 질문과 그에 적절한 답변을 영어로 출력해 달달 외웠다. 또 현찰 없이 카드만 들고 가면 불법체류 의도가 있다고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분실의 위험이 있지만 1,500달러를 환전하여 현금으로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저렴한 비행 편을 택하느라 어쩔 수 없이 직항이 아닌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서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하는 여정을 택했다. 경유지인 밴쿠버에서 환승을 위해 서둘러 탑승구로 갔다. 기내에서 다시 한번 입국심사 연습을 하려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LA가 아닌 캐나다 밴쿠버에서 뜬금없이 그 악명 높은 미국 입국심사를 받게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젠장... 도대체 왜 미국 입국 심사를 캐나다에서 하는 거지?'
중년의 백인 남성인 입국 심사관은 내게 "며칠 동안 체류할 것인지?", "얼마를 소지하고 있는가?"와 같은 뻔한 것들을 물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미리 공부를 하고 갔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예상 외로 일이 술술 풀리니 만족스러워 미소가 절로 머금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관은 내 손을 가리키며 쥐고 있던 종이를 달라고 했다. 입국 심사를 대비하기 위해 미리 작성해 간 예상 문답지였다.
'이걸 왜 달라고 하지... 미리 준비한 답변이라고 진정성을 의심하면 어떡하나.' 입국이 불허 될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사내의 단호한 표정에 다소 겁을 먹기는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종이를 건넸다. 그런데 나는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타입이라 심사관이 오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저 망했다며 단념하기 시작했다.
심사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를 응시했다.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느새 180도였던 눈썹의 각도는 45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항공권과 호텔에 큰돈을 지출했는데 모두 공중분해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호탕한 웃음이 들려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내게 어디를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순진한 표정으로 디즈니랜드 예매권을 보여주었다. 불법 체류의 의도가 있는 사람은 보통 값비싼 관광지를 예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그는 행운을 빈다며 나를 풀어 주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자기 입장에서는 별것도 아닌 입국 심사를 위해 내가 공부를 했다는 사실에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 인근에 내렸다. 밤늦게 도착했기에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간단히 끼니를 때울 것을 구입하기 위해 코리아타운의 유명한 한인마트를 찾았다.
이곳으로 말하자면 코리아타운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LA 재미동포들과 오랫동안 함께한 곳이다. 과거 1992년의 LA 폭동 당시에는 남성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옥상에서 소총을 들고 지역을 수비하여 한인들의 안전을 지켜낸 일화가 있기도 하다.
주린 배를 달래는 것보다 커진 호기심 때문에 쏜살같이 마트 안으로 달려갔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 동양인이었다. 아마 모두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9할 이상의 상품은 모두 한국어로 적혀 있었고, 우리나라 유명 프랜차이즈도 입점해 있었다. 정말 '코리아타운' 그 자체였다. 머나먼 타국에서 정착해 살아가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나는 필요한 물품을 모두 사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한인 계산원은 봉투가 필요한 지 묻고는 이어서 말했다. "23불(弗) 50전(錢)입니다." 눈치로 23달러 50센트라는 것을 알아채고, 50달러 지폐를 건넸다. 거스름돈을 받은 뒤에 쓸데없이 몇 마디 건네보며 장난을 주고받고 받았는데, 무엇보다 우리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이들도 그 때문에 연대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의 숙소를 향해 캐리어를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도로가 꽤나 울퉁불퉁해 걷기가 불편했다. 가로수의 크기는 또 얼마나 큰지 고개를 한참 들어 올려보아야 했고, 뿌리가 지면으로 돌출되어 보도의 절반을 덮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걷는데 앞에 어떤 흑인 사내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흠칫 놀라더니 딴청을 피웠다. 이윽고 내가 그를 지나치니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낙서를 하였다가 검거된 일이 있다. 그들은 서양에서는 예술이라 죄가 되지 않는다며 항변을 했다고 하는데, 이제 와서 보면 거짓말인 것 같다. 나는 계속 뒤를 보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마침내 숙소 앞에 도착했고, 그 앞에는 신문 판매기가 있었다. 1달러 동전을 넣으면 우리나라 신문사의 미주지부 일간지를 볼 수 있길래 신기해서 한 부를 사들고 객실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열악한 곳이라 너무 심심해서 신문을 펼쳐 들었는데, 첫 면에 제법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한인 OOO씨, 경찰 간부에 오르다."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말이 있다. 낙엽 하나로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뜻인데,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우리 동포들의 고생과 설움이 얼마나 컸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 먹먹해진 채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