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여자들끼리 싸울 때 머리채를 잡아?"
"김장은 정말 집집마다 만드는 거야? 그럴 때 배추는 몇 포기나 쓰는데?"
바야흐로 한국 드라마 전성시대를 맞은 일본. 나는 그런 일본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내 주변 일본인들은 나를 만나면 한국에 대한 궁금즘을 쏟아낸다. 패션, 음식부터 정치, 경제까지. '그게 왜 궁금할까?' 싶을 만큼 질문의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여기엔 가족에 대한 질문도 많다. 일본에 비해 한국 드라마 속 가족 관계가 가깝고 친밀하게 묘사되기 때문일 테다. 덕분에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다.
"진짜 한국 시어머니들은 다 그렇게 무서워?"
일본에서 흥행한 많은 한국 드라마, 거기서 주로 최대 빌런(악역)으로 나오곤 하는 한국 시어머니들. "그럴 리가 있겠니? 좋은 시어머니도 당연히 있지"라고 대답은 하지만, 그럼에도 고부 관계 하나만 놓고 봐도 한국과 일본이 다르단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일본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내 시어머니는 일본인이다. 나는 15년 전 만난 일본인 남편과 4년의 연애 끝에 2015년 결혼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까지 시어머니와 이렇다 할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다.
오해는 금물이다. 일본도 사람 사는 곳인데 여기라도 고부 갈등이 왜 없을까. 당장 내 주변만 봐도 시댁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왕래가 잦을수록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며느리들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시어머니와 '조금 가까운 타인'으로 지내는 며느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먼저 나만 해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일 년에 두어 번, 생일이나 연말연시가 전부다. 그 외 아이들 사진을 보내거나, 용건 있을 때 연락하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나는 시어머니를 향해 '어머니'라 부르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은영상(씨)'이라고 부른다. 좋게 말하면 산뜻하고, 어떨 땐 너무 정이 없나 싶은 우리 관계. 하지만 이게 특이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 주변 일본인들의 며느리-시어머니 관계는 한국보다는 건조하고 담백한 경우가 많다.
곧 있으면 한국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오랜만에 가족, 친척들이 모이는 기쁜 날이지만 한국의 '며느리'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라는 것을 안다. 오죽하면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그러나 최근엔 한국의 명절 모습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한국에 있는 내 지인들 중에는 올 추석 때 귀성 대신 여행을 간다는 사람도 많다. 제사상을 간소화하기로 했다거나,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사 노동을 분담한다는 가정도 늘었다.
올 4월 종영한 <눈물의 여왕>에는 이런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등장했다. 한복을 입은 며느리가 아닌, 정장을 차려입은 사위들이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었다.
해당 장면은 한국 뿐 아닌 해외 누리꾼들에게도 화제였다. 내 주위 일본인들도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가 제사 음식 준비하는 것은 처음 봤다"라며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누가 음식을 준비하느냐를 떠나, 다 같이 모여 제사상을 차리는 것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흥미로운 볼거리였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일본에도 한국 명절처럼 선조를 기리려고 가족들이 모이는 날은 있다. 보통 8월 13일부터 16일 전후로 이어지는 '오본' 연휴다.
이 오본은 우란분회(盂蘭盆會)라는 불교 행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란분회는 지옥과 아귀보(굶어 죽게 되는 업보)를 받은 중생을 구하려 베푸는 법회 이름이라 한다.
일본 오본 연휴는 한국 광복절인 8월 15일과 날짜가 겹친다. 하지만 이는 우연의 일치에 가깝다. 이 연휴는 전쟁 발발 전인 19세기부터 이미 정착돼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8월 15일은 '종전의 날'로 여긴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도식이 각지에서 개최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오본 연휴의 풍경은 한국의 추석과 비슷했다. 고향에 돌아가 선조들 묘를 찾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다만 한국처럼 제사상에 공을 들이지는 않는다. 선조의 위패가 놓인 불단 앞에 떡 몇 조각과 과일 등을 올리는 정도다.
우리도 매년 오본 연휴에 시댁을 찾지만, 딱히 명절 스트레스는 없다. 식사도 간단히 해결한다. 시어머니가 밥과 국거리를 준비하고, 나와 남편이 아이들 취향을 고려해 찬거리를 만든다. 번거로울 때는 배달 음식을 먹거나 아예 외식을 하기도 한다.
한편, 일본에서도 대량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날도 있다. 12월 31일부터 1월 2일까지의 연말연시 때다. 새해 첫날 집안일을 하지 않으려, 직전에 미리 연초 먹을 음식을 만들어 두는 전통이다.
이런 음식을 '오세치 요리'라고 부른다. 연휴 내내 두고 먹기 때문에 국물이 없고 보존성이 높은, 즉 염장류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장수, 부귀 등을 상징하는 새우, 청어알, 연근, 토란 같은 식재료가 단골 메뉴다. 재료에 따라서는 설탕과 간장으로 아주 달게 조려내기도 한다.
과거에는 각 가정마다 오세치 요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전통은 거의 사라졌다. 대부분 가정들이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완제품을 구입하거나, 오세치 요리 없이 새해를 보낸다.
명절 스트레스는 없어도 고향은 그립다
이렇게 요리나 가사 노동 스트레스가 없는 명절을 보내지만, 나는 그 사실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풍성한 음식을 앞에 두고 가족, 친척들과 마주 앉았던 한국 풍경이 그리워져서다.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강원도가 고향이었던 친정 엄마는 추석이 되면 매번 감자로 송편을 만들어 우리에게 먹이곤 하셨다.
검은 빛이 도는 감자 전분 가루로 반죽을 빚어 팥이나 콩을 넣어 손으로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었다(강원도식이라고 한다). 갓 쪄낸 감자 송편, 따뜻하게 한 입 베어물면 나던 그 고소한 맛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우리 엄마. 하필이면 멀디 먼 경상도 땅에 와 시집살이를 하며 두고 온 친정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추석이 되면 감자 송편을 빚으며 고향을 그렸을 엄마의 마음을, 고향 떠나 일본에 와 있는 지금의 나는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누구 한 사람에게만 노동의 부담이 전가 되는 일 없이, 가깝다는 이유로 상처 주는 일 없이, 모두에게 행복한 한가위가 되기를. 특히 나처럼 이국에서 고향땅을 그리는 교민들에게도 마음만은 풍요로운 명절이기를 마음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