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 행담도 하면 주로 떠올리는 단어다. 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들어서기 직전인 2000년까지 이 섬에 사람이 살았다. 우리 역사도 담겨 있다. 개발에 밀려 끊어진 행담도 사람들이 역사와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당진시에서 최근 펴낸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를 주로 참고하고, 추가 취재한 내용을 보탰다.[편집자말] |
옛 주민들은 행담도(행담섬)가 조선시대 중반까지 육지였다고 생각한 듯하다. 1959년 당진시에서 지명의 유래를 조사했는데 행담도에 대해 '약 500년 전에 한진 바다가 개통됨에 따라 섬이 됐다 함'이라고 짧게 기록했다. 원래 육지였는데 500년 전 섬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행담도 앞바다 전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먼저 행담도가 속한 아산만 앞 당진 송악읍 한진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살펴보자.
옛날 토정 이지함 선생이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다. 산에 올라가서 일대의 지리를 살폈다. 그는 그 길로 집마다 찾아다니며 내일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나니 모두 피난을 가라고 외쳤다. 주민들은 별이 저렇게 총총한데 홍수는 무슨 홍수가 난다고 야단이냐고 투덜대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자는 사람을 깨우며 얼른 피난을 가라고 이르고 다녔다.
그런데 협수룩한 차림의 지게꾼이 오더니 ' 지금 이곳이 모두 바다가 될 것이니 빨리 당신 몸이나 피하시오. 어서 저 언덕 위로 오르시오'라고 조언했다.
순간 천지가 뒤흔들리는 것처럼 천둥이 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을과 논밭은 삽시간에 바다가 되고 말았다. 지게꾼이 이야기하던 곳도 바다가 됐다. 토정 선생이 서 있던 바로 그 아래에 나루가 생겼는데 이게 바로 한나루(한진나루)다.
한나루 앞바다에 커다란 바위가 오르고 그 둘레에 조그만 바위가 솟아올랐다. 훗날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바위 앞을 지나다 달빛에 비친 바위를 조선 군사로 보고 달아났다. 왜적들을 지킨 바위라 '영웅 바위'라고 불렀다. - 1966년 당시 대전대 국문과교수인 한상수씨가 당진시 송악면 기지시리 이옥심으로부터 채록한 내용 요약
여기에 등장하는 '영웅 바위'는 행담도 앞에 있다. 토정 이지함이 아산 현감에 제수된 때가 1578년이니 약 450년 역사를 품고 있다. 이 전설은 토정 이지함 선생의 예언 능력을 토대로 육지였던 곳이 큰비로 바다가 됐다고 설명한다. 또 재난이 닥칠 때 관리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비슷한 이야기는 1979년 당진군이 채록한 '한진 앞바다 터진 이야기'로도 전해진다. 실제 이지함은 걸인들의 구제책으로 걸인청을 세우는 등 백성 구휼에 힘쓰다가 1578년 세상을 떠났다.
전설처럼 행담도가 조선시대 중반까지 육지였는데 섬이 됐다기보다는 당시 지진 이나 해일 또는 큰비로 물난리를 겪은 일로 생긴 전설로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바뀐 한자 하나...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행담도' 지명에 대한 첫 기록은 1864년(고종 원년)에 발간한 '대동지지'에 '行澹島'(행담도)로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는 '行澹島(행담도)는 신북면(현 신평면)의 동쪽 경계에 있는 작은 섬으로 그 아래에는 대진(한진)이 있고, 수원 가는 지름길로 바다 한가운데는 영웅암이 있다'고 기록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심한 백중사리 동절기에 물이 빠져 매산리 육지 쪽에서 섬으로 물건을 지고 갈 수 있다' 해 行(다닐 행), 澹(움직일 담, 맑을 담)이라고 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한자가 '行淡(행담, 물담을 담)'으로 바뀐다. 1919년 발행한 지형도와 1934년, 1941년 제작한 당진 평택지역 지도(1:500,000)에도 '行淡'으로 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자어를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법정 지명은 '行淡'(행담)이다.
정작 원주민들과 인근 마을주민들은 '가치내'라고 불렀다. '섬에 갇혀 잘 나오지 못한다'(갇히네)는 의미였단다.
"바람도 많이 불고 교통도 불편해 '한번 들어가면 갇힌다'고 해 가치내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행담도를 풍도라고 할 만큼 바람이 많이 불어 배가 못 뜨는 날이 많았거든요." - 한정만, 행담도 원주민
"들어가면 갇힌다고 해서 '가치내(갇히내)라고 했어. 나 클 때 나가서 육지 사람들 만나면 '가치내 사람 왔네'라고들 했어." - 이은주, 행담도 원주민
행담도 인근 당진 송악면 부곡리에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심훈 선생이 1935년 행담도를 방문하고 쓴 수필 <칠월의 바다>에도 '가치내'라고 썼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 한 절해의 고도다. - 심훈 <칠월의 바다> 중
행담섬에는 '한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해 마실 물을 찾아 헤매던 끝에 샘 하나를 발견하고 그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리고 과거 길에 올라 장원 급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로 '토끼섬으로 불렸다'는 설명이지만 (국토교통부가 2010년 펴낸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유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행담도 밖 일부 주민들이 한때 행담도를 토끼섬으로 부르긴 했다. 토끼 모양을 하고 있어 생긴 이름인데 널리 불리던 이름은 아니었다.
종합하면 조선시대까지는 행정지명으로 '行澹'(행담)으로 썼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行淡'(행담)으로 썼다. 행담도 원주민이나 이웃 마을 주민들은 1970년대 말까지 주로 '가치내'라고 불렀다. 원주민들도 '행담'이라는 이름은 행담분교(1961년 개교)가 생긴 후 학교에서 주로 듣기 시작했단다.
지명을 원래 표기인 '行澹'(행담)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금은 이 섬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리고 상 하행 여행객이 머무는 휴게소가 생기자 많은 사람이 오가는(行) 것을 예측한 예언적 지명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