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모두가 기다리는 명절이었다. 일제 치하 배고프던 시절, 그날만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집에서 빚은 밀주도 추석 때만은 묵인했다고 한다. 서울 등 객지로 간 식구들도 추석엔 고향에 모두 모여 웃음꽃을 피웠다.
이러한 분위기는 해방이 돼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은 더 분주했다. 가난한 살림에도 추석명절 상차림에는 정성을 다했다. 대추, 밤, 사과, 배, 감 등 5가지 과일은 반짝이는 놋쇠 위에서 위엄 있게 보였다.
조청과 송편, 시루에 찐 편은 엎어 상에 올렸다. 식혜도 만들었다. 5가지 나물색은 선명했다. 다시마도 튀겨 7장을 포갰다. 차례상에는 손바닥만한 삶은 농게도 자리했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따라 피라미드식으로 조성된 선산에 올라 약주를 따랐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생생한 북쪽 추석 풍경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가 들려주곤 하던 고향 개풍군의 추석 풍경이다. 지금도 가끔 아버지가 기억을 더듬으며 전해주는 명절 이야기는, 얘길 듣다 보면 너무 생생해서 마치 영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아버지 얼굴은 동심으로 돌아간 듯 상기됐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월남해서 아버지는 추석 명절을 소중히 여겼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생사 여부도 딱히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고향에서와 같이 예를 갖춰 차례를 지냈다.
추석이 임박하면 나도 마음이 급해진다. 일주일 전부터 추석 제수를 준비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이다. 아버지는 추석 전날 모든 과일을 손수 닦고 밤은 직접 쳤다.
차례는 장손인 내 기준으로 증조까지 올린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집에서 차례를 지내면 그게 끝이 아니다. 전곡에 모신 어머니 묘소도 성묘했다.
하지만 내게 시집 온 아내는 죽을 맛이다. 과일을 제외하고 준비하는 것도 10가지가 넘는다. 손을 던다고 나는 전 부치기를 전담했다. 이것으로 친적들에 전문가 소리까지 들었지만, 아내가 감당하는 고행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이렇게 틀에 갇혀 차례를 지내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송편도 직접 빚는 가정은 거의 없다. 우리 집만 해도 제수를 상당히 간소화했다. 주과포 정도를 준비하고 되도록 일손을 줄이고 있다. 즐기던 윷놀이도 시나브로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북쪽 고향을 그리워하며 추석 명절을 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지 못하는 고향과 그곳의 부모님과 가족들 얼굴이 추석에 유독 떠오르시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추석은 아버지가 자식으로서 못다 한 효심을 뜻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추석을 회고하며 늘 이야기하는 단골 소재가, 장단 외가에 감 한 대접을 갖다 주는 심부름에 다녀오던 때의 얘기다. 아버지 고향의 감은 많이 나기도 했지만 품질도 좋고 맛도 좋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해마다 추석 즈음 감을 챙겨 아버지(당신 아들)를 통해 외가에 보냈단다. 어렸던 아버지는 감이 무겁고 어린 마음에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긴 했어도, 외가에 도착하면 늘 환대를 받았다며 그 시절을 기쁘게 회상하곤 하신다.
북한이 남한보다 더 명절 분위기... 추석마다 모이는 실향민들
실향민 2세인 나는 아버지 뜻을 이어 추석 명절의 의미만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차례를 지내는 집안의 수고로움을 격려하고 손위 어르신들께 간단한 선물을 나누는 풍습은 애들에게도 물려주고 싶다.
내 뒤를 잇는 자식들이 내가 하듯 전통과 명절을 지킬지는 미지수다. 할아버지와 내가 하는 걸 보고 배웠기에 알기야 알겠지만, 그걸 꼭 지키라고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지금 시대와는 어긋나는 것 같다.
개풍군 실향민들은 추석에 대개 집에서 따로 차례를 지내는 편이다. 그러나 특수한 사례도 있다.
개풍군에서도 중면 사람들은 일찍이 뜻을 모아 경기 김포에 따로 동산 묘지를 마련해뒀고, 이곳에 추석과 설 명절 때면 늘 날을 정해 모인다. 어르신과 후손들이 함께 벌초를 하고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전통이 됐다고 한다. 대신 이쪽 사람들은 우리집처럼 따로 지내는 번잡한 차례를 없앤 이들이 다수다.
실향민들이 추석을 명절로 쇠는 건 남북한이 비슷하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사뭇 다른 것 같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2000년대 초반에 북한을 벗어나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북한이탈주민)들은 이곳 추석 명절에 대해 놀라는 점이 두 가지다.
북한에서는 추석이 하루만 명절(휴일)인데, 남한은 3일이나 내리 쉰다는 것이다. 북한은 당일 벌초하고 묘지에서 차례를 지내기에, 그 하루도 짧고 바쁘다고 한다.
또 하나는 남한은 추석 명절에 쉬거나 여행을 가는 등 연휴 분위기인데 반해, 북한은 좀 더 경쟁적이라는 것. 가족들이 모여 전을 부치고 술과 음식을 장만해 조상을 기리는데, 동네 중 누구의 집이 음식을 더 잘 차렸는지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더불어 원래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인사를 해야 하지만, 이날만은 이들 동상에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조상이 수령보다 더 중요한, 아주 큰 명절로 친다는 것이다.
탈북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북한이 남한보다도 옛 추석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 같다. 한 탈북민은 "추석은 북한 정권이 주민 다독이는 데 활용하는 일종의 정치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말하는 사회주의나 독재 체제와 추석이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던 전통이기에 추석 명절을 예외적으로 특별히 정권이 묵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탈북민을 포함한 대다수 탈북민들은, 한국에 온 뒤에는 북한에서와 같은 모습의 추석은 쇠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북에 부모와 가족을 두고 온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다. 또한 한편으론 생계가 급하고 먹고살기가 여의치 않은 현실적 여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추석을 맞아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고, 추석을 전후해 임진각 망배단을 찾아 고향인 북을 향해 차례를 드리는 사람이 늘고 있다.
'추석 전전날'이 왜 이산가족의 날이 됐을까
우리 집도 이번 추석은 그냥 간소하게 보내기로 했다. 일단 내가 암으로 투병 중이기에 따로 차례상을 크게 차리거나 준비하는 번거로움을 생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아쉽지만 아버지도 허락하셨다. 하지만 내심 얼마나 서운하실까.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이달 초에 미리 어머니 묘소에 다녀왔다. 95세인 아버지는 이미 연로하시고 이동도 힘에 부치셔서, 약 3년 전부터 성묘를 하지 못하고 계신다. 묘소에 간 우리는 현장 사진을 찍어 아버지께 보내드렸다.
이번 추석에 비록 차례상을 차리지 못하지만 우리는 가족끼리 모이려고 한다. 그런데 차례는 고사하고 가족끼리 만남도 갖지 않는 등 아예 추석을 쇠지 않는 가정이 의외로 주변에 많다. 이에 추석을 전통으로라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지난해 추석 전전날, 즉 추석 연휴 전날(추석 이틀 전)을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2023년 3월 28일 공포됨에 따라, 이산가족의 날(추석 前前일, 음력 8월 13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들이 우리 곁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외로움을 공유하는 실향민들도 이제는 거의 돌아가시고 없다. 아버지 고향 학교 동창들 중 전쟁 당시 총 37명이 한국에 왔는데, 현재 살아있는 분은 아버지 포함해 3명 뿐이라 한다(관련 기사:
실종된 딸 찾아 25년 헤맨 그 마음, 우리는 잘 압니다 https://omn.kr/2a0ve ).
'이산가족의 날' 기념일 지정은 명절 분위기를 되살려보려는 의미와 함께, 한편으론 여전히 북녘에 고향이 있고 가족이 남아있는 이산가족들이 추석을 가장 큰 명절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올해 이산가족의 날은 15일이다(제2회). 노쇠한 95세 아버지 등을 보며, 언젠가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실 수 있기를 아들인 나도 함께 바라는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