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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 도서출판나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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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서야만 길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이 보인다. 마침내 그 지역이 보인다. 나는 그 길에서 쇳물 도시로만 여겼던 포항의 숨겨진 얼굴들, 원래의 모습들을 보았다.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여정 자체가 목적이다. 이번 여정이 가르쳐준 하나의 큰 메시지는 철의 도시 포항, 산업도시 포항, 그 포항의 남쪽과 북쪽, 그리고 포항 안에도 철(鐵) 이전에 길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하 이름만 표기)이 오랜만에 책을 펴냈다. <서귀포를 아시나요>(2019) 이후 5년만이다. 도보여행에 관한 책이지만, 지역은 제주가 아니다. 포스코와 해병대, 대게와 과메기로 널리 알려진 포항이 주인공인데, 더 정확하게는 '포항의 길' 이야기다. <철(鐵) 이전에 길이 있었네>(도서출판 나루)는 2023년 8·9·10월 세 차례에 걸쳐 서명숙이 걸었던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철길숲에 관한 '주관적 도보여행기'다.

"예순이 넘도록 가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못 가본 데 대한 아쉬움도 없었던 도시" 포항은 서명숙에게 그저 스쳐 지나간 '산업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의 초청으로 올레길 특강을 하면서 포항에 발을 내디뎠다. 특강의 인연이 그를 '포항의 길'로 이끌었고, 포항에 대한 그의 선입견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2022년 포항시민들과 호미반도 둘레길을 처음 걸었던 그는 "긴 세월 포항에 대해 품고 있었던 기존의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포항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도시가 아니었고, 철 하나로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다정하고 순박한 갯마을과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의 호미반도 해안가,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성분과 모양의 암석과 암반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서 말을 건네는 갈매기들이 그를 반겼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펴낸 책 <철(鐵) 이전에 길이 있었네>(도서출판 나루)의 표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펴낸 책 <철(鐵) 이전에 길이 있었네>(도서출판 나루)의 표지.
ⓒ 도서출판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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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은 호미반도 둘레길을 역방향으로, 해파랑길(포항 구간)을 순방향으로 걸었다. 한쪽으로는 포스코 공장 굴뚝과 높은 아파트가, 반대 방향으로는 서정적인 낭만을 자아내는 호미곶 등대가 손짓하는 '포항의 길'은 "살아있는 향토 역사 교실이요, 최고의 지질 암석 전시장이자, 풍성한 해양 공원"이라는 게 그의 온 몸에 각인됐다. 그렇게 호미반도 둘레길을 걸으면서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철(鐵) 이전에 이곳에 길이 있었네!"

이 책은 '포항의 길'에 관한 교과서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참고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만, 국·내외 다양한 길을 만드는데 관여하고 직접 걸었던 사람이 내 귀에 대고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끔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연인 서명숙의 독백 같은 이야기도 얼핏 엿볼 수 있다. 때로는 도보여행자의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은 문제점도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이처럼 올레·둘레길 같은 굴곡이 있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늘 경험하는 일이지만, 일단 길을 떠나야 목적지에 이르는 법이다. 언젠가는 두 발이 우리를 그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이라고 말하는 서명숙. 그가 경험했던, 이 책을 통해서 전하고 싶어했던 이야기를 서명숙이 제안하는 '올레·둘레길 재밌게 걷는 법 6가지'로 정리해봤다. 늘 그렇듯 '6가지'라는 건 큰 의미가 없다.

[#1] '놀멍 쉬멍 걸으멍' 천천히 즐기며 걷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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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래사장 걷기로 시작해서, 모래사장 걷기로 마무리 짓는다. '놀멍 쉬멍 걸으멍' 그리고 가끔은 바닷가에 주저앉아서 '멍 때리멍' 걷다 보니 어느덧 노을의 시간이다. 눈길을 먼 바다 쪽으로 던지니 호미반도 저 너머로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서명숙이 제주올레에 대해 처음으로 쓴 책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올레 여행>(2011)에서 '놀멍'(놀면서의 제주어)을 맨 앞에 내세운 건 '숙제하듯 길을 걷지 말라'는 뜻이었다. '놀멍'과 '쉬멍'이 없는 '걸으멍'은 감흥도 없고, 오래 가기 힘들다. 그가 올레 개장행사 때마다 "속도전을 벌이는 올레꾼들을 보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한" 까닭이다.

천천히 길을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보릿고개 때 미역 따다가 배고픔을 이겨 붙여진 이름 '보릿돌',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다가 발견한 정겨운 이름 '물보라 상회', 동경 129도 35분 10초, 북위 36초 02분 51초에 위치한 육지 동쪽 땅끝마을 석병3리, 모래사장을 걷다가 죽도시장에 걸어가서 아침밥을 먹고 다시 돌아오는 포항살이 아침의 루틴, 이렇게 '작지만 소중한 일상'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던 덕분에 그의 곁에 다가온 '포항의 속살'이다.

1999년 호미곶에 만들어진 대형 조각상 '상생의 손'. 흉물일 거라는 선입견을 깨고 전율을 느꼈고, 그동안 오해했던 게 미안했단다. 상업·관광도시 느낌의 구룡포와, 바로 옆 대보항에서 느끼는 한적한 어촌의 풍경도 느린 걸음이었기에 체감되는 비교다. 그는 "걷기 여행은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데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가는 동안 길이 주는 즐거움을 최대한, 길게 누리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2] 동네 사람들에게 말 걸고, 재래시장에 꼭 가보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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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 아주머니가 뭔가를 방파제 담벼락 위에 널고 있다. 모처럼 만난 마을 분인지라 냉큼 말을 걸었다. '뭘 말리시는데요?' '보믄 모리나? 청각이지.' 맞다. 청각이다. 아주머니는 지나는 길손에게 대뜸 지청구를 준 게 미안해서인지 묻지도 않았는데 말린 청각을 어떻게 보관했다가 어떻게 해 먹는지, 그 레시피까지 가르쳐주신다."

동네 사람들에게 말 걸기는 서명숙의 주특기다. 단, 바쁜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다. 초면의 동네 분에게 지청구를 들었지만 헤어질 때는 "건강 유지할라카문 많이 걸어야 한다카대. 우야든동 조심해서 잘 걸으소"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받기도 한다. 영암3리 빨간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 앞 정자에서 만난 70대 남자 분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 분의 형수님이 제주도 출신으로 '출가 물질' 온 해녀였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한가득 선물 받기도 한다.

"(죽도시장) 입구의 어시장부터가 그러했다. 경매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펼쳐진 어시장 난전에는 그야말로 바닷속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듯 과메기, 개복치, 고등어, 조기, 문어, 갈치 등 다양한 어종들이 즐비했다. 아주머니들의 고무 대야에는 각종 다양한 고동류가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여서 손님들을 유혹한다. 다른 골목에는 이 지역의 명물이라는 고래고기가 부위별로 팔리고 있었다."

2023년 포항에서 일주일 살이를 할 때, 그는 죽도시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아침이면 동빈내항 길을 걸어서 죽도시장에 가서 어시장 주변을 이리저리 해찰하다가 칼국수집들이 하나 둘 장사를 시작할 무렵이면 칼제비 한 그릇을 후루룩 먹고선 다시 거꾸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진한 멸치 국물이 비결인 듯한 죽도시장 안 식당의 '칼제비(칼국수+수제비)'는 포항 걷기여행의 비타민이었다.

서명숙은 "여행할 때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는 안 가더라도, 그 지역의 전통 재래시장만큼은 꼭 들르곤 한다". 서귀포 재래시장의 식료품 가겟집 딸로 자라났던 DNA도 한몫한 듯 하다. 그는 스페인의 산티아고길 종점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도, 태국에서도 그 나라, 그 지역의 재래시장은 필수 방문 코스였다. 재래시장에는 "그 지역의 특성이 오롯이 살아 있고, 사람의 온기가 있고, 서로 간에 소통이 이뤄지기 때문"이란다.

[#3] 코스 역방향으로 걸어보고, 샛길로도 빠져보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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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반도 둘레길을 정방향으로 걸을 때는 구만리 이곳이 1코스 시작점부터 내내 따라다녔던 포스코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곳이다. 헌데 역방향으로 걸으니 처음 포스코와 만나는 지점이다. 걷는 방향에 따라서 같은 장소가 하나의 풍경과 이별을 고하는 곳이 되기도, 만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호미반도 둘레길에서는 구만리가 그런 곳이다."

코스별로 이어진 올레·둘레길을 걷다보면, 시작점과 종점이 같은 지점인 경우가 많다. 서명숙은 '제주올레 완주자'에게 "다음에는 부디 역방향으로 걸어보라"고 권한다. 같은 코스라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선 오른쪽에 있던 바다가 왼쪽에 있는가 하면, 시작에서 만났던 오름을 마지막에야 오르는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길의 구성이 달라지고, 보는 시야가 달라지는 묘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지난해 8~10월 서명숙은, 해파랑길(포항 구간)은 순방향, 호미반도 둘레길은 역방향으로 걸었다. 그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호미반도 둘레길에서는 포스코가 랜드마크 구실을 톡톡히 한다는 것을. 정방향으로 내려가면 포스코가 점점 아스라이 멀어지는데, 역방향으로 올라가면 포스코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웹툰 <송곳>의 명대사처럼 "걷는 방향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게 된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서명숙은 '코스대로 걷지 말고 샛길로도 빠져보라'고 꼬드긴다. "사실 길은 그게 누가 만든 길이든지 간에 반드시, 꼭 정해진 루트를 따라서 걸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루트는 도보여행자를 위한 기본 정보와 기준일 뿐"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한 번쯤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나서 여기저기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려 보거나, 인근에 자기의 관심을 끄는 곳이 있다면 들렀다가 되돌아 나와서 다시 (올레·둘레길) 리본을 따라 걸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길은 마지막 종점에 이르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오늘의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을 충분히 즐기는 데서 비로소 걷는 의미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때로는 목적지까지도 여정의 즐거움과 길 위의 만남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 게 도보여행이다. 호미반도길 리본이 가리키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서 방파제로 향한 것도, 길에 나서기만 하면 무조건 직진 모드로 돌입하는 내 친구에게 길은 반드시 이정표를 따라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4] 걷기 전에 알아보고, 걸으면서 더 깊게 보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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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은 해안 지형의 전시장이다. 영일만과 구룡반도가 자리해 굴곡이 큰 포항은 동해안에 자리한 시·군 중에서 해안이 가장 길다. 전국에서 가장 최신의 지질시대인 신생대 제3기 층이 분포하는 젊은 땅이라 화산활동의 흔적인 주상절리, 온천, 신생대 제3기 층의 생물화석, 1970년대 석유 산출 해프닝, 천연가스가 아직도 타고 있는 포항철길숲의 '불의 정원' 등이 있다."|민석규의 <포항해안 지역산책> 중에서

호미반도 둘레길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독수리바위가 있는 마을.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거대한 바위계단이 형성돼 있는데, 학술용어로는 '해안 단구'다. 서명숙은 이곳을 지날 때 지질전문가 민석규 선생의 설명을 떠올렸다. 알고나서 보니 새로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된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걷다가 만난 '포항의 길' 풍경도 그렇다.

포항이라고 하면, 포스코 만큼이나 해병대를 빼놓을 수 없다.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환동해미래연구원의 서상문 원장은 세 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 포항이 지닌 지정학적 위치다. 공항, 항만, 철도 등 수·륙·공 교통시설을 모두 갖춘 포항은 천혜의 요새다. 둘째, 한국전쟁 직후 한국과 미국 측의 두 장교의 숨은 노력이 빛을 발했다. 셋째, 독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서 원장은 "(국가 기간산업인 포스코의 안전을 책임지는 불침번 노릇을 하는) 해병대는 포스코가 포항에 들어설 수 있는 토대를 닦은 포항 발전의 숨은 공로자"라고 평가한다. 대게와 과메기로 널리 알려진 구룡포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어업권을 수탈당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고,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이 왜 일본과 맞닿아 있는지,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그늘에 가려진 장사전투 때 침몰한 비운의 전함 문선함의 이야기를 안다면, 도보여행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5] 길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지·관리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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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구룡포) 해안 일대를 뒤덮은,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더 많아 보이는 바다 쓰레기였다. 쓰레기는 분량도 어마어마했고, 가짓수도 엄청 많았다. 고기 잡는데 쓰는 이런저런 어구, 찢어진 그물, 플라스틱 물통, 스티로폼 부표, 표지판, 빈 생수병, 음료수 캔 등등. 발밑에 나뒹구는 생수나 음료수병 중에는 일어가 표기된 것도 여럿 있다. 집어들어서 살펴보니 유효기간이 2024년까지로 표기된 음료수병도 있었다."

해안가에서 마주하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는 도보여행자들에게 시각적 불편함을 주는 문제만이 아니다. 바다 생태계와 바다 먹거리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제주올레도 개장한 지 2, 3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쓰레기 문제에 직면했다.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은 "누가 버렸든 간에 주범을 따지기 전에 쓰레기를 줍자"는 것이었다. 몰래 하지 말고, 대대적으로! 그렇게 시작된 게 '클린올레 캠페인'이다. 2011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곳도 있었다. 칠포에서 오도리까지의 해안길. 바닷가 데크길 구간에는 기암괴석과 소나무들만 곳곳에서 반길 뿐, 쓰레기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접한 바닷가 해안 풍경이 어찌 이리도 다른 것일까. '깨끗한 칠포2리 클린 캠페인' 플래카드 밑에는 분리수거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명숙은 "역시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즐기는 일에는 그만한 책임도 따라야 한다"고 여긴다.

도보여행자를 공포로 모는 '칼 보행' 구간은 하루빨리 정비해야 한다. 서명숙은 해파랑길과 영덕 블루로드 길을 걷다가 인도는 물론 갓길조차 없는, 차량만을 위한 국도 구간을 맞닥뜨렸다. 달리는 차가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칼 보행' 구간을 걸으면 그동안 느꼈던 힐링과 고마움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칼 보행' 구간은 아래 사유지 주인들과 협의를 하든, 관할 지자체가 별도의 데크길을 만들든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6] 나만의 시선으로 보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라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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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바위 앞에 펼쳐진 조그만 몽돌해안. 그곳 몽돌로 쌓아올린 앙증맞은 소원탑들. 나도 그 돌들 위에 마음을 얹기로 한다. 이 바닷가 돌들은 동글동글 모서리가 다 닳은 전형적인 몽돌이다. 수천, 수만의 긴긴 시간 파도에 씻기면서 한없이 둥글어진. 근데 나는 왜 60년이 넘도록 산전수전을 다 겪어내고 인생의 이 파도 저 파도에 수없이 휩쓸렸는데도 둥글어지지 않는 걸까. 아직은 더 치러야 할 인생 전투가 남은 걸까."

서명숙은 포항의 길을 (혼자 또는 일행들과 함께) '따로 또 같이' 걸었다. 동행 없이 혼자 걷는 날에도 그는 대화한다. "해파랑길과 호미반도 둘레길을 걷는 내내 따라다니던 갈매기들이 오늘도 여전히 (내게) 말을 건네온다"며 "따지고 보면 혼자가 아니다. 호미반도 둘레길은 갈매기와 함께 걷는 길"이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독백처럼 곱씹는다. "아니, 갈매기만도 아니지. 구름도 늘 함께 하는 길동무다."

'포항의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제주올레를 떠올린다.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른지. 제주올레 6코스 게우지코지라는 바닷가 근처에서 자라는 우묵사스레피 나무들을 보면서는 제주올레길 개척 초기 탐사를 함께 했던 동생 동철이를 떠올린다. 반쯤 누워 있는 자세의 그 나무들을 보면서 동철은 그에게 말했다. "쟤네들도 이 바람 타는 섬에서 살아남젠 저추룩 애썸수게(저렇게 애쓰고 있잖아요)". 총연장 437km의 제주올레는 그런 우묵사스레피처럼 낸 길이다.

('하늘올레'로 떠나가신) 어머니가 평소 하던 말씀도 떠오른다. '너는 길에 미쳤다'고. '엄마 말이 맞는 말이다. 나는 걷는데 미쳤다. 걷다보니 중독됐다. 그런데, 걷는데 미친 건 아름다운 중독이다. 이 바쁜 현대사회에서 진짜 미치지 않기 위해서 걷는다'고 자문자답한다. 왜 굳이 비바람과 햇빛을 맞으면서 바깥에서 걷느냐고? "비바람, 햇빛도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그 자연이야말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무언으로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그래서 오늘도 서명숙은 걷는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3년 8~10월 걸었던 '포항의 길'. 그는 호미반도 둘레길, 해파랑길(포항 구간), 포항 철길숲 등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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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이전에 길이 있었네

서명숙 (지은이), 나루(도서출판)(2024)


#호미반도둘레길#해파랑길#영덕블루로드#포스코#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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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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