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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는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우물처럼 내면을 비추고, 지나가는 하늘을 오래 가슴에 머물게 한다. 김영민은 그 언어를 '성찰적 드립'이라고 명명한다. 김영민의 단문집 <가벼운 고백>의 노란 색지에 적힌 발문 "성찰적 드립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맷돌처럼 진지한 세계에 왜 드립이 필요한지를 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명문이다.

단죄의 언어, 조롱의 언어, 막말의 언어, 기어이 상대를 감옥에 보내버리겠다는 다짐의 언어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드립이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잘 구사한 드립은 핸드드립처럼 수줍고 섬세하며, 궤도를 이탈한 고삐 풀린 문장은 진지할 수만 없는 인생에, 종종 부조리와 경이를 간직한 삶이라는 현상에,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한 발 빗겨 서서, 완전히 그들로부터 지배받지 않는다는 즐거운 감각과 자유를 선사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드립을 위해 기존의 언어를 비틀어야 한다며 친절하게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 못 먹겠어"라고 하면 드립이 아니니, "오늘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못 먹겠어" 해야 한다고.

김영민 단문집 <가벼운 고백> 인식의 조명이 닿지 않은 곳에 적절히 조명을 비추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자아내는 드립이 페이지 곳곳에서 무시로 펼쳐진다.
김영민 단문집 <가벼운 고백>인식의 조명이 닿지 않은 곳에 적절히 조명을 비추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자아내는 드립이 페이지 곳곳에서 무시로 펼쳐진다. ⓒ 김영사

필멸자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에서 기인한 드립

취약함은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인간의 특징이다. 인간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취약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21쪽

내가 왜 이 나무를 좋아하는지 알아? 이 나무는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거든. -25쪽

외로울 때가 제정신이다. -45쪽

단문집은 마음이 머문 곳, 머리가 머문 곳, 감각이 머문 곳으로 1부에서 3부로 나뉘어 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며 읽어도 무방한, 아주 낮은 문턱과 엷은 칸막이로 구성되어 있다.

세속의 보편적 인식이 미처 미치지 못한 곳, 얼핏 인식의 조명이 닿지 않은 곳에 적절히 조명을 비추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자아내는 드립이 페이지 곳곳에서 무시로 펼쳐진다.

드립의 바탕에는 필멸자(必滅者)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스며 있다. 취약함, 외로움이 디폴트값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자의 피할 수 없는 고뇌가 쓰러진 나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현실과 분투하는 인간은 쓰러졌음에도 여전히 자라는 나무일 것이다.

결국 패배하고 소멸해갈지라도 우아한 드립으로 그 패배와 소멸마저 사랑으로 끌어안으며 생의 순간, 순간을 주체적으로, 재기 발랄하게 가꿔가라고 일러준다.

강파른 막말의 세상, 고라니처럼 튀어나온 드립

부재(不在)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독해력이 달라진다. 침묵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주장들이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느냐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문해력이 달라진다. -108쪽

세상은 엉터리가 많고, 생은 유한하며, 마음은 가난하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다. -119쪽

경청은 중요하다. 이 경청에는 자신에 대한 경청도 포함된다. -163쪽

언어의 빈틈을 한 번 더 비틀면 드립이 된다. 김영민이 선사하는 드립은 그 언어의 빈 공간을 십자꺾기로 꺾어든다. 감시자를 누가 감시하며(171쪽), 이발사는 누가 이발을 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며 시국선언에 대한 시국선언을 요구한다.
이런 순발력을 유지하기 위해 늘 메모할 준비를 하라고 권한다. 드립을 향한 상념은 고라니처럼 고요한 일상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이니(159쪽).

엉터리 세상 속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유한한 생을 살아가다보면 자칫 놓치기 쉽고,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기 쉬운 대중들에게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 침묵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주장을 저자의 날카로운 독해력과 문해력으로 캐치해 그 일단을 선보인다.

예술적 감각으로부터 돋아나는 감각적 드립

인간은 문화적 양서류다. -201쪽

좋은 투수는 스트라이크과 볼의 경계에 투구한다. 좋은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239쪽

육체적 폐활량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 폐활량도 그만큼 중요하다. -246쪽

저자는 문화적 양서류로서 인간이 문화에 질리면 야생을 꿈꾸고, 야생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또 문화라는 물에 몸을 적셔야 하듯이(201쪽), 좋은 투수의 공이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에서 노닐 듯이(239쪽) 진지한 현실의 세계와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궤도를 이탈한, 허탈한 드립의 언어를 던져 현실을 비틀고 타파해 나갈 것을 권한다.

인생이 농담은 아니어서 누구나 넘어지면 아프고, 살갗이 찢어지면 피가 나지만, 그래서 인간은 진지하게 앞날을 계획하고, 먹거리를 사냥하지만(12쪽), 그래도 삶의 진부함을 경멸하면서, 지배적 권력의 언어에 벗어나 자유를 찾고 유연하게 상대 정신의 빈 곳을 가격하라고 권한다.

현실에 포섭된 갇힌 언어와 그 그물을 벗어난 드립의 언어는 어쩌면 한숨과 심호흡처럼 종이 한 장의 작은 차이(48쪽)일지도 모른다. 그 한 장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육체적 폐활량뿐만 아니라 정신적 폐활량을 늘리는(246쪽) 노력을 기울일 것을 권한다.

한 장의 차이를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모여 이룩한 드립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깨알 같은 드립의 언어가 인생의 각박한 리듬을 한결 유연하고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김영민의 <가벼운 고백>을 읽으면 드립을 옹호하는 저자를 흔쾌히 옹호하게 된다.

가벼운 고백 - 김영민 단문집

김영민 (지은이), 김영사(2024)


#김영민#가벼운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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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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