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벽화, 공간이 된 예술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진행 중인(2025년 1월 19일까지) 니콜라스 파티(1980~)의 <더스트> 전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미술관 벽에 그려진 파스텔 벽화 <폭포>이다.
피같이 강렬한 붉은빛의 돌덩이들이 내장처럼 쌓여 있고 그 가운데로 거대한 물줄기가 흐른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기이하고 생경한 예술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듯 작가의 도발적인 인트로에 이끌려 그의 세계로 들어간다.
니콜라스 파티는 <폭포> 외에도 전시 곳곳에 파스텔 벽화를 그려 넣어, 그의 환영과도 같은 작품 세계로 이끈다. 이번 전시에서 파티의 벽화는 5점으로, 6개월에 걸쳐 완성됐다.
니콜라스 파티에게 파스텔 벽화는 공간적 예술로 만드는 마법적인 장치로 쓰여왔다. 벽화로 공간성을 확보한 다음, 자신의 작품을 내거는 방식은 작품의 서사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버섯이 있는 초상>에서 핏빛 나무 숲의 배경은 어둡고 축축한 곳에 서식하는 버섯을 나비와 병치시키면서 성장과 변형, 나아가 재창조를 도모하는 여성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키 듯 말이다.
파티는 또한 전시에 건축적 요소를 부과해 예술적 경험을 극대화시키는 작가다. 특히 관람객들이 아치형 문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공간적으로 경험하게 한 후, 아치형 문을 통과해 작품을 극적으로 만나는 예술적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예술적 경험은 주로 르네상스 작품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원래 그려진 그곳에서 직접 대면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예술적인 특권이다. 이탈리아 산마르코 성당의 아치형 문과 벽화를 통해 경험하는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이나, 중세 성당 안 천장까지 그려진 벽화와 공간적 요소를 부각하는 제단화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3차원적인 예술적 경험과 감동을 현존 작가 니콜라스 파티가 환기시키고 있다.
과거 미술의 샘플링
파티는 우리가 미술사에서 접할 수 있는 과거 미술을 자유자재로 차용하는 화가다.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관람객이라면 이번 전시에서도 미술사로부터 차용된 파티의 변주를 감상할 수 있다.
<동굴이 있는 초상>, <나무가 있는 세폭화> 이 두 점의 세폭화는 중세시대 제대화를 샘플링한 것이다. 15세기경 세 폭의 제대화는 양쪽으로 펼쳐진 패널을 여닫을 수 있고 사이즈도 작아서 개인 묵상용이나 개인 예배당의 제대화로 쓰였다.
당연히 기도의 대상인 예수, 마리아, 성경의 장면이 그려졌다. 파티는 누구의 초상인지도 모르는 인물을 제대화에 넣고 양쪽 패널 부분에는 초록색 동굴과 물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나무들을 그려 넣었다.
비현실적인 풍경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정체성과 인종을 파악하기 애매하다. 현재 우리가 묵상하는, 기도하는 대상도 무늬만 대리석일 뿐인 작품의 표면처럼 허상은 아닐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밖에도 16, 17세기 카라바조, 렘브란트 등이 주로 사용한 회화적 눈속임을 의미하는 '커튼'과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인 작품들도 떠오르면서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재미를 더했다.
동양미술과의 조응
이번 전시가 니콜라스 파티에게도 특별한 점은 처음으로 그가 동양미술과의 조응을 시도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리움미술관 소장 국보급 작품들이 대거 출현했다. 장생, 불멸을 상징하는 조선 18세기 <십장생도 10 곡병>은 파티의 사계절 풍경과 함께 아름다운 연작을 이뤘다.
장생을 염원하는 것이 일 년에 사계절이 바뀌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영원한 장생은 계절이 순환하듯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쇠퇴하고 죽음에 이르고, 또 다른 생명이 움트는 것과 같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세속, 고통을 떠난 도교 신선들과 불로장생 신비의 과일 복숭아가 재현된 김홍도의 <군선도>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8선의 초상화로 변주되었다. 장수의 상징인 복숭아로 둘러싸인 <복숭아가 있는 초상> 속 향긋하고 핑크빛 복숭아에 둘러싸인 생기 없는 무표정의 여성은 탐스럽고 아름다운 복숭아와 대비된다.
이 또한 덧없이 사라지리라
파티의 작품 하나하나는 색감과 비현실적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하지만, 덧없이 스러져가는 생명들에 대한 아스라한 소멸의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더스트>, '먼지'라는 전시 제목도 파티 이러한 예술의 주제를 더욱 강화한다.
작품 <폐허>는 문명의 쇠퇴를 시각화했고 <붉은 숲>, <구름> 같은 작품에서는 인간문명에 비해 영속성이 있다고 간주되었던 자연조차 그 끝을 피해 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이번 전시에서만 '생존'하는 그의 파스텔 벽화처럼, 작가는 말한다. "모든 것은 결국에는, 먼지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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