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유언을 통해 삶의 지혜와 통찰을 배워보고자 한다. 의로운, 이상적인, 유유자적한, 때론 청빈한 선비들의 유언은 유언에 그치지 않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과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기자말] |
조선이 망국(亡國)의 길로 접어들기 열흘 전의 일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대한제국 2대 황제)은 1910년 8월 19일 전직 관리 16명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명했다. 여기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이름도 있었다.
순종은 "고 승지 정약용은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재주가 일세에 탁월하였다"(순종실록 양력 1910년 8월 19일)고 평했다. 그런 정약용에게 정2품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이 추증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명단엔 앞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연암 박지원의 이름도 보였다.
다음 날인 8월 20일(양력) 실록엔 열 명이 늘어나 무려 26명에게 시호를 내렸다고 나와 있다. 이날 정약용에게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박지원 역시 정약용과 같은 '문도(文度)' 시호가 주어졌다. 같은 날, 같은 시호를 내렸다는 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뛰어난 문장가들이기에 '문(文)'자를 넣어 각각 다른 시호를 내려 그들을 평가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게다가 상당 기간 시간이 걸리는 시호 작업을 하루 만에 끝냈다. 그것도 한꺼번에 스물여섯 명이라니. 망국을 앞두고 서둘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다행스럽고 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살아생전 복권의 날을 보지 못하고 죽은 다산이 아닌가. 실로 사후 74년 만에 명예회복이 된 것이다. 하지만 원통하게도 열흘 뒤인 8월 29일, 조선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어 국권이 침탈되고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조선의 현실을 진단하면서 망국을 예언했던 다산이 아닌가. 이는 '국가 개혁 마스터플랜'이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잘 드러나 있다.
"당장 안 고치면 반드시 나라 망한다" 경고했지만
'유표(遺表)'는 신하가 죽을 때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유배 죄인으로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다산이었기에, 유언 삼아 남긴 것이 '유표'였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당시 자신이 본 나라의 현실을 이렇게 지적했다.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만다. (蓋一毛一髮, 無非病耳, 及今不改, 其必亡國而後已)" <국역 경세유표>(민족문화추진회, 아름 출판사)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아니라 "반드시 망한다(必亡國)"고, 확신에 가깝게 강하게 피력한 것이다. 다산의 이런 울부짖음에도 나라의 병폐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 조선은 헌종~철종~고종을 거쳐 순종 때에 이르러 정약용의 예언대로 망국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인이었던 정약용은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라는 사학(邪學)죄인에 연루되었지만, 실상은 붕당정치의 피해자였다.
정적인 노론 벽파의 재상 서용보, 같은 남인이었던 이기경 등은 "정약용만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번번이 다산의 해배(유배에서 풀려남)를 막아섰다. 심지어 사헌부 장령 이안묵은 강진 현감으로 자청해 내려가 다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정적들에게 둘러싸인 다산이었기에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의지대로 지킬 수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주역>에 '괄낭무구(括囊無咎)'라는 말이 나온다. '주머니의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다산은 이런 의미처럼 유배 동안에 '주머니 묶듯이' 스스로를 단속하고 경계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다산은 <주역>에 능했다. 강진 백련사의 콧대 높던 혜장 스님을 한방에 거꾸러트린 필살기도 <주역>이었다. 다산은 그런 혜장을 순치(馴致)시킨 후, 아이 '아(兒)' 자를 넣어 아암(兒庵)이란 별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산은 <주역>을 통해 자신의 앞날과 미래를 점쳤던 건 아닐까? 반대 세력들이 언제 목숨을 거두어갈지 모르는 상황.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는 서울의 두 아들(학연과 학유)에게 보내는 편지는 실상 그 자체로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다산은 아들에게 폐족(廢族: 조상이 큰 죄를 지어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집안)의 자제로서 조심하고 또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삶의 처세, 학문하는 자세 등을 일러주었다. 한 번은 재물에 대해서 이렇게 경계의 말을 전했다.
"재물은 단단하게 잡으려 할수록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메기와 같다.(握之彌固, 脫之彌滑, 貨也者, 鮎魚也)"
언젠가는 흩어지고 말 재물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아비의 간곡한 충고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재물 대신 두 글자를 물려줬다. 바로 근(勤, 부지런할 근)과 검(儉, 검소할 검)이다.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역, 창비)
강진 유배, 최악의 상황에서 끌어낸 최고의 성취
근(勤)은 다산이 제자에게도 당부한 덕목이다. 시골 아전의 아들인 황상(黃裳)이 스승 다산을 만난 건 열다섯 살 때였다. 그때 황상이 자신은 무지렁이 수준이라고 말하자, 다산은 '부지런하고(勤) 부지런하고(勤) 또 부지런하라(勤)'라는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주었다.
더 나아가 근(勤)은 다산이 평생 스스로 실천한 덕목이기도 하다.
황상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생님은 강진 유배 생활 동안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고 했다. 이른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고사다. <삶을 바꾼 만남>(정민 저, 문학동네)
복사뼈(踝骨)에 세 번이나(三) 구멍이 났다(穿)? 도대체 양반다리로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기에 이런 말까지 나왔을까. '과골삼천'은 다산의 부지런함을 설명하는 상징어와도 같다. 필자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말도 떠올려 본다. 이 말이 다산의 삶과 닮아서다.
이섭대천은 <주역>에 자주 등장하는 데, 글자 그대로 '큰 강(하천)을 건너면 크게 이롭다'는 뜻이다. 사실, 이섭대천은 간단히 설명하기엔 심오한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대천(大川: 큰 강)은 고난, 역경, 위험 등을 의미한다.
다산은 환갑이 되던 해에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귀양살이를 이렇게 적었다.
"(...) 경계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동안 (나는)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준 복이 아니겠는가?"
고전 연구가 조윤제는 <다산의 마지막 습관>(청림출판)에서 이 대목을 두고 "다산은 최악의 상황에서 오히려 중요한 성취를 이뤄냈다"고 했다. 이 말을 이섭대천(利涉大川)에 적용해 보자. 최악의 상황인 유배는 대천(大川)에 해당하고, 중요한 성취인 저술 활동은 이로움(利)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모든 것을 삼켜버린 유배였지만, 다산은 그런 유배를 '하늘이 준 복(福)'으로 승화시켰다. 18년 유배 동안 500여 권에 가까운 저술을 할 수 있게 도와줬으니 '진정한 이로움'이 아니겠는가.
'이섭대천(利涉大川)'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약동섭천(若冬涉川)'과도 연결된다.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 신중하고 조심한다는 의미다. 다산이 집 당호로 '여유당(與猶堂)'을 내건 이유도 여기에 있다.
40세에 유배를 떠난 다산이 해배, 즉 귀양이 풀려 자기 고향 마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온 건 57세 때였다. 17년 만, 떠날 때 창창했던 선비는 나이가 들어 있었다. 다산은 고향에서 18년을 더 살다 결혼 60주년인 회혼날 "집 뒤 동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836년 2월 22일, 그의 나이 74세였다.
필자 같은 산꾼들은 팔당의 예빈산~예봉산~적갑산~운길산 코스를 다산 능선이라 부른다. 다산이 어릴 적 형들과 자주 다녔다는 길이다. 다산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지난 9월 15일 다산 능선을 다시금 돌아보았다.
다산과 인연이 깊은 운길산 수종사를 들른 후, 다산 생가 '여유당(與猶堂)'으로 향했다. 곧장 뒷산 묘소로 갔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문도공(文度公) 정약용. 필자의 손엔 그의 역작 <경세유표>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