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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선비들이 학문에 열중했던 서원이나 정자는 하나같이 빼어난 경치 속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빼곡하게 푸른 산, 앞으로는 졸졸 흐르는 맑은 물. 바람 솔솔 불어오는 자연 속에 깊숙이 파묻혀 책 펼쳐놓으면 글이 술술 읽히겠구나 싶다.

하지만 슬그머니 다른 생각도 든다. 그 좋은 경치 눈앞에 두고 어떻게 글에만 집중했을까. 어느 순간 '검은 건 글자요, 흰 것은 종이로다'가 되지 않았을까. 놀 궁리 가득 베짱이 같은 이의 생각일 뿐일까. 하지만 실제로도 옛 선조들의 많은 글에는 아름다운 경치와 술이 마치 단짝처럼 함께 등장한다.

갈건에 거른 술을 나 혼자 다 마시고
만수풍암에 발 벗고 누웠으니
어떻다 청풍명월이 내 벗인가 하노라.

작자미상의 옛시조다.

이제 막 익은 술을 갈건으로 걸러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잔을 세면서 먹으리라.
화창한 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시냇물을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술잔에 지고 붉은 꽃잎은 옷에 진다.

유명한 정극인의 <상춘곡>이다.

글이 술술에서 술이 술술이 되는 순간 이처럼 주옥같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안동의 술 하나, 진맥소주

이렇듯 절경 속에서 술을 즐기는 풍류는 그 역사가 깊은데, 좋은 경치에 술이 함께 하는 건 지금도 다름없는 듯 하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바위 절벽과 그 앞을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 흰 모래사장이 어우러지는 곳. 마주하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곳은 안동이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 ⓒ 배은설

안동에서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도산면 가송리에는 농암종택과 고산정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 역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곳이어서일까. 농암종택 맞은편 강 기슭에 위치한 맹개마을에 누군가가 맹개술도가를 꾸렸다. 박성호 이사가 직접 재배한 100% 유기농통밀로 만든 진맥소주를 만드는 곳이다.

육지 속의 섬으로 향하듯 트랙터를 타고 물을 건너 맹개마을로 들어가는 동안 마주하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맹개마을에 들어서도 아름다움은 이어진다. 특히 요즘 같은 가을이면 하얀 메밀꽃 소복이 피어나 더 아름다워지는 이곳엔 절경과 더불어 술, 술이 가득하다.

 안동 맹개마을 메밀꽃밭
안동 맹개마을 메밀꽃밭 ⓒ 배은설

토굴로 만들어진 자연 숙성실로 들어서자 특유의 술 내음과 함께 오크통, 옹기 등에 담긴 술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 진맥은 밀의 옛말이다. 박성호 이사의 진맥소주는 유기농 밀로 만든 증류식 소주이다.

 안동 맹개술도가 토굴 속 진맥소주
안동 맹개술도가 토굴 속 진맥소주 ⓒ 배은설

진맥소주는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에 술 빚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전통이 깊다고 한다. 박성호 이사는 이에 더해 진맥소주를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키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 색이 투명에서 갈색빛이 된다고 한다. 증류주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설명하는 박성호 이사의 말 하나하나에는 술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안동의 술 둘, 264 청포도와인

소주를 만나봤다면 이번엔 와인은 어떨까. 안동에는 264 청포도와인이 있다. 264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떠올린 인물이 있다면, 맞다.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시가 와인으로 재탄생됐다.

안동은 청포도, 절정, 광야, 꽃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이육사 시인이 태어난 곳이다. 264청포도 와인은 선생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화이트와인이다. 이육사 선생이 태어난 안동시 도산면에서 청포도를 재배하고, 그 청포도를 빚어서 만들어진다.

 와인으로 재탄생한 이육사 시인의 시
와인으로 재탄생한 이육사 시인의 시 ⓒ 배은설

와인의 이름은 '절정', '광야', '꽃'으로 시인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드라이와인과 스위트와인으로 각각의 맛과 향이 모두 다르다. 도산면에 있는 매장에서 시음도 가능해 자신에게 맞는 와인을 찾기에도 좋다. 이육사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와인의 맛을 천천히 음미해보시길.

근처에는 이육사문학관과 더불어 도산서원, 시사단, 예끼마을, 선성수상길이 있다. 고즈넉한 풍경을 가진 곳들이니 264 청포도 와인과 함께 들러 봐도 좋을 여행지들이다.

안동의 술 셋, 임하막걸리

쌀과 밀,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는 또 어떨까. 임하막걸리는 숙성시킨 발효주이지만 깔끔함이 특징이다. 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임하양조장에서 빚은 술이다. 임하양조장은 무려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술을 빚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술 빚는 일을 하고 있다는 대표가 뜻밖에도 젊다. 임하 생막걸리의 라벨이 감각적인 이유였다. 임하 생막걸리의 라벨은 안동의 대표 관광지인 월영교 위로 해가 뜨는 듯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동이 트는 이른 새벽에 막걸리를 만드는 데서 착안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이렇듯 젊은 감각을 더하며 숙성된 깊은 맛을 오래도록 이어가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을 터. 3대째 가업을 이어온다고 전하는 그의 선한 얼굴 속에는 단단한 심지가 엿보인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물론 책 읽기 더없이 좋은 때다. 하지만 파란 하늘에 그림 같은 구름 하나 두둥실 걸려있고 바람도 제법 선선하게 불어온다? 그러면 어쩌랴. 책 덮어야지. 술 꺼내야지.

만드는 방식도 재료도 맛도 풍미도 모두 다른 술이 안동에 있다. 진맥소주, 264 청포도와인, 임하막걸리뿐만 아니라 안동소주, 일엽편주 등 각양각색의 술이 있다.

때마침 안동은 한창 신명나는 축제가 펼쳐지는 중이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축제장 내의 다양한 부스 중 주류를 선보이는 곳도 있다. 국내외 팀의 다채로운 탈춤 공연도 즐기고 술이 술술 넘어가는 축제장에서 술 한 잔 맛봐도 좋겠다.

또는, 나홀로 즐기는 풍류가 제격이지 하시는 분들은 화려한 축제장을 유유히 뒤로 한 채 안동 곳곳의 수려한 풍경과 특색 있는 술술술, 술을 찾아 떠나보셔도 좋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그래서, 여행’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실립니다.


#안동지역술#진맥소주#264청포도와인#임하막걸리#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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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여행하며 자주 글자를 적습니다. <그때, 거기, 당신>, <어쩜, 너야말로 꽃 같다> 란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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