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으로 2개월 시한부 인생을 사는 64세 여성이 영정사진을 찍고 싶다며 공원으로 나가 활짝 핀 매화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말기암 환자의 표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 미소가 활짝 피어난다.
남은 시간이 몇 주 안 되는 79세의 남자가 웃으며 사진을 찍고 나서 "제 인생 최고의 웃음이네요"라고 말한다. 그는 "아내와 만나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을 때 너무 행복했어요. 그리고 회사에서 사장이 됐을 때도 행복했고요. 그런데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에는 제가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분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장이었을 때 직원들을 먹여 살린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저도 믿기기 않지만,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마치 여기가 극락 같아요"라며 행복한 깨달음의 시간을 고백한다.
평소 목욕을 즐기던 그는 방문 목욕서비스를 자주 이용한다. "목욕 후에 마시는 맥주는 그야말로 꿀맛입니다." 그의 말에서는 지금 있는 그대로 행복한 사람의 홀가분함이 전해진다.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66세의 여성은 남은 시간을 산책하고 수다 떨고 풀 뽑고 불고기를 먹으면서 보낸다. 그리고 이틀간 거동을 못 하고 누워 있다가 죽음을 맞았다.
암으로 40대의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가 단골 약국의 약사에게 말했다. "남편이 집에서 편히 눈감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생명의 촛불이 서서히 꺼져가는 과정을 몸소 가르쳐준 것 같아요. 아이들도 아빠가 화장실 갈 때 부축해주기도 하면서 곁을 끝까지 지켜줬고요.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돼지고기 된장국을 먹고 싶어 했는데, 일이 바빠서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거예요"라고.
30대 여성이 위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암 수술 후 2년 내내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우울증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그녀가 아이들과 1박 여행도 다녀오고 친구들과도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간의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한방에서 자다가 숨을 거뒀다.
암으로 생명이 며칠 남지 않아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60대 여성이 퇴원을 원했다. 며칠 후 퇴원하기로 결정되었고, 집으로 간다는 희망이 생겨서 그런지 몸 상태도 조금 좋아진 듯했다. 차 안에서 기사에게 집에 가는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집에 도착해서는 가족의 부축을 받긴 했지만 두 발로 서서 집으로 들어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가족들과 사진도 찍고, 찾아온 친구들과 얘기도 나누고,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손자에게 유언도 남겼다. 그렇게 집에서 36시간을 보낸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자들은 호흡이 느려지는 할머니를 어루만지며 죽지 말라고 울었다. 숨이 멈춘 걸 확인하고 어른들이 간호사와 함께 수의를 입히려고 하자, 손자들이 엔젤케어-고인의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고 얼굴에 화장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간호사가 전문적으로 담당한다-를 하겠다고 나섰다.
사람이 죽으면 온몸이 차가워져서 다시는 온기를 찾을 수 없다는 걸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몸소 가르쳐 주셨다고 며느리는 말했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몸을 만지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일본 재택의료의 대가 오가사와라 분유의 <더없이 홀가분한 죽음>에 소개된 사례들이다.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빼앗기지 않고 평온하게 또는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게 살다 죽어갈 수 있었던 데는 저자의 재택호스피스완화케어 프로그램이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단골 환자가 집에서 평온히 죽음을 맞던 모습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아 그 이후로 25년 이상 재택의료를 위해 힘써왔다. '여기가 천국이다', '꿈만 같다'라는 찬탄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입에서 종종 터져 나온다. '비교적 좋은 의료 돌봄 제도와 참 좋은 의사가 만났을 때 그런 찬탄이, 꿈만 같은 현실이 가능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환자의 몸 상태 등 중요한 진실을 알려야 할 때 환자의 손을 잡는다. 첫 번째 이유는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맥을 짚어보기 위해서이다. 맥박수가 분당 140회 정도로 올라가면, 의사가 무슨 말을 해도 환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100 이하로 떨어져야 진정된 상태인데, 그때까지 저자는 환자의 손을 잡고 기다린다. 손과 손을 잡고 눈과 눈을 맞추는 것, 즉 손과 눈으로 환자를 살피는 것이 재택 호스피스 완화 케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는 '설마 죽음이 홀가분하기까지 하겠어?'라는 저항감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점점 홀가분해져 버렸다. 물론 이 이야기가 내가 사는 지역이나 한국 사회의 이야기도 아니고, 꿈도 꿀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홀가분한 죽음'을 위해서는 최첨단 기술이나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술이나 돈보다 더 값진, 시간과 마음을 내어 손과 눈으로 우리 삶의 마지막 길을 살피고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성인은 임종 장소로 집을 꼽은 사람이 가장 많지만, 실제 사망자 10명 중 8명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사망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존엄한 삶과 죽음을 고민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무엇보다 이런 불일치가 왜 지속되고 있는지를 정직하고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이런 진정성과 정식성을 바탕으로 기술과 돈 등의 자원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초고령 사회를 앞두고 우리 사회는 원치 않더라도 돌봄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18년 '어르신이 살던 곳에서 건강한 노후를 보낸다'는 슬로건과 함께 '지역사회 통합돌봄'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는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기본계획에서 말하는 커뮤니티 케어란 '주민들이 살던 곳(자기 집이나 그룹홈 등)에 거주하면서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누리고, 지역사회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 보건의료, 요양, 돌봄, 독립생활의 지원이 통합적으로 확보되는 지역주도형 사회서비스 정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바와 너무나 일치하는 정책이라서 반갑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계획 덕에 죽을 때까지 내 집에서 지역사회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노인들이 살아가는 집과 마을의 풍경을 바꿔내지 못한다면, 온갖 새로운 구호나 단어들은 쓰이기도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작년부터 관련 예산이 대폭 줄어들고, 그나마 모범적으로 시행해오던 지역의 사업들이 흔들거린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런 현실을 접하며 정책의 진정성과 현실성에 대한 기대가 더 깨져버렸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마치 불가항력의 자연재해에 무기력하듯 죽음이라는 미래에 대해 무기력하고 공포스럽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겠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가녀리지만 강한 희망의 불빛을 보는 느낌이었다. 삶의 마지막 길과 죽음이 공포스럽고, 회피 외에는 공포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다른 사회를 꿈꾸며 관련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