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술가의 방 한구석. 1909
미술가의 방 한구석. 1909 ⓒ 그웬 존

나의 세계를 만들다

1929년 출간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앞서 시각예술에서 여성 화가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그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주로 작업실이다. 20세기 초에 여성 화가들이 그려낸 화가의 작업실은 자신만의 창작 공간을 갈구하고, 나아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중에서 그웬 존Gwen John, 1876~1939이 그린 '파리, 미술가의 방 한구석'(1909)은 특별하지 않은 방의 한 귀퉁이를 특별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가 있는 구석으로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와 귀퉁이 공간을 포근하게 감싼다. 존의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만큼이나 그가 담아내 공간도 차분하다.

이 공간에서 조용히 제 얼굴을 관찰하는 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방은 한 개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세계이다. 그 공간에서 홀로 생각하고, 창밖을 바라보고, 휴식하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생산적인 활동을 한다.

그웬 존은 대표적으로 사후에 '재발견' 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듯이 어느 순간 그의 이름도 잊혀져갔다. 존은 1946년 런던 마티센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재발견되었다. 사망한 지 7년이 지나서였다.

존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꾸준히 그려왔지만 현재 남아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그린 것은 19세 때 작품이다. 그웬의 어머니 오거스타는 아마추어 수채화가였다. 예술과 가까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존은 1895년부터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진학해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이미 그의 남동생인 오거스터스도 다니던 슬레이드는 당시 영국에서 유일하게 여학생 입학을 허용한 미술학교였다. 존은 슬레이드의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런던 박물관의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그림을 배웠다.

존의 색감을 보면서 누군가는 진작에 휘슬러의 흔적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1898년 존은 파리로 떠나 제임스 애보트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가 설립한 아카데미에 다녔다. 그곳에서 휘슬러의 색채를 익혔다. 1년 후 런던으로 돌아온 존은 1900년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1903년에는 런던에서 남동생 오거스터스와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다음 해 다시 파리로 건너간 존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의 모델로 활동했다. 주로 여성 예술가를 위한 모델로 활동하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모델로도 일하게 되었다.

파리 로댕 박물관에 남아있는 천 통 이상의 편지가 이들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데, 둘은 연인관계였다. 로댕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그와의 관계가 잘 알려졌지만, 사실 존은 평생 동안 여러 동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 1922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 1922 ⓒ 그웬존

세상을 멀리하다

그웬 존은 주로 인물화와 정물화를 그렸다. 대체로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조용한 분위기로 앉아 있는 익명의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인물 주변의 인테리어도 단순하다. 인물들의 얼굴형은 갸름하고 몸의 4분의 3 정도를 화폭에 담았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1922)는 이러한 성격을 잘 담고 있다.

알려지기 위해 애쓰기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처럼 그웬 존은 적극적 은둔을 실천했다. 고요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웬 존은 마티스, 피카소, 브랑쿠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내성적인 태도와 자발적 은둔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의 많은 인물들과 함께 전시를 이어갔다. 그러나 당대 예술의 경향에 영향을 받기보다 고독하게 작업하기를 선호했다. 그웬 존만의 고요한 분위기는 그렇게 지켜질 수 있었다.

인생의 후반부는 파리 외곽의 뫼동이라는 마을에서 고양이와 살며 종교와 그림에 열중했다. "나의 종교와 나의 예술, 그것이 곧 내 인생이다"고 말할 정도였던 존의 당시 노트에는 '신의 작은 예술가'가 되고 싶고 '성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적혀 있다. 은둔인 동시에 제 예술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미국 수집가 존 퀸이 그웬 존의 작품을 알게 된 후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존은 모델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은둔 속에 만들어졌던 그의 작품을 지금은 런던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와 워싱턴 D.C.의 여성미술관, 카디프 국립 박물관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은 그웬 존의 삶과 예술을 다룬 2차 창작물도 여러 편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2006년에 출간된 마가렛 포스터의 소설 《세상을 멀리하다Keeping the World Away》이다. 이 소설은 존과 가상의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존의 대표작인 '파리, 미술가의 방 한구석'이 소설의 모티브이다. '세상을 멀리하다'라는 제목은 존이 남긴 글에서 따왔다.

"세상을 멀리하는 규칙: (필요 이상으로) 사람의 말을 듣지 마세요, 사람을 보지 마세요, 가능한 한 사람과의 대화를 적게 하고, 사람과 접촉하면 가능한 한 조금만 이야기하세요… ."

덧붙이는 글 |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10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예술#예술사회학#페미니즘#미술관에간페미니즘#그웬존
댓글

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