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약 7천 개이며, 이중 문자가 존재하는 언어는 30개지만 만든 사람과 글자 원리 등 체계적으로 정리된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고 한다.

주시경 선생이 '한 나라의 큰 글, 세상에서 첫 번째 가는 글'이라는 뜻으로 명한 한글은 1926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신민사(新民社)와 공동으로 훈민정음 반포 제8 회갑(480년)이 되던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겨레의 넋을 살려내자는 민족운동 차원에서 기념식을 진행하였고,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건의로 1989년부터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우리나라 유산 중 처음으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의 정신과 과학성을 알리고 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은 2009년부터 한글을 문자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최근 일문 일답 형식의 <세종실록에 숨은 훈민정음의 비밀>(우세종, 모아북스)이 출간되었다. 훈민정음(한글)을 만든 이가 세종대왕인지, 집현전 학자들인지, 언제부터 만들었으며, 창제와 반포는 언제인지 등에 대한 논쟁이 계속 있어 왔는데 이 책은 이와 같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어준다.

저자 우세종을 만나 그의 주장을 들어보았다.

"집현전 학자들은 새로 문자를 만들 능력 없었다"

훈민정음과 불교에 대해 설명하는 우세종님 사찰에서 훈민정음의 반포 과정과 불교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저자 우세종님
훈민정음과 불교에 대해 설명하는 우세종님사찰에서 훈민정음의 반포 과정과 불교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저자 우세종님 ⓒ 박진우

우세종은 "책에 밝힌 것처럼 집현전 학자 중에는 문자를 새로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학자가 없었으며 한글 창제 과정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실록에 숨은 훈민정음의 비밀>을 집필하기 위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과정을 기록해 놓은 많은 기록물 중에 "조선왕조실록으로는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을 인용하였고,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세종어제'와 '훈민정음해례' 그리고 '정인지 서문'(鄭麟趾 序文) 등을 샅샅이 훑으며 분석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훈민정음의 왜곡을 하나씩 정리했다"라고 밝혔다.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효심이 강하고 백성을 사랑한 세종(1428)은 진주에 사는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해 강상죄에 해당하기에 사형을 승인해 달라는 보고를 보고 충격을 받아 백성을 깨우치는 글을 통해 부모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훈민정음을 만들기로했다"라고 밝혔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시기에 대해서는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난 후 2년 8개월 동안 <훈민정음해례> 집필을 명하였고, 세종 28년(1446년) 9월에 해례본을 편찬하고, 9월 29일에 세종실록에 등재하였"는데 "창제 과정은 승려 신미대사와 세종 그리고 아들인 수양대군(세조)과 딸인 정의공주 등 핵심들만이 관여했다"고 밝혔다.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의 서문이라 하는 정인지 서문에 등장하는 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은 훈민정음 연구가 시작된 계기이자 김화 사건이 일어난 세종 10년(1428)에 과거 급제를 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집현전 부제학인 정인지는 여러 관직과 부친 상에 의한 사직 그리고 세종의 명으로 여러 책을 편찬하느라 훈민정음을 연구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정인지는 한문에는 능통하였으나 소리 글자를 몰랐으므로 훈민정음을 만들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세종은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도 궁궐 내에 법당을 만들고 왕실의 불사를 직접 주관하는 등 불교에 귀의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은 부처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수양대군에게 만들게 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게 하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세종은 "불교계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세종은 법력(法力)이 높은 데다 한문은 물론 산스크리트 문자와 파스파 문자 등 여러 문자에 해박한 신미대사에게 훈민정음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고, 신미대사는 세종 10년(1428) 10월 3일부터 사대부와 유생들의 눈을 피해 서울 흥천사, 청계사, 경기도 가평 현등사, 예빈사, 황해도 장연 천불사, 강원도 춘천 청평사 등에서 훈민정음을 연구하며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창제에 대해서는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세종실록에서 제(制)자만을 사용하였는데 상친제(上親制), 신제(新制), 창제(創制), 제작언문(制作諺文)에서처럼 '제'자는 반포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글자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조 5년(1459)에 편찬된 훈민정음 언해본에 의하면 '훈민(訓民)'은 '백성을 가르치는 정(올바른, 정확한, 바로잡는)한 소리'라 하였고 '정음(正音)'은 '정한 소리니 정히 반듯하게 옳게 쓰는 글일지니 이름하여 정음이라 하나니라' 하였다. 즉, 부모를 잘 섬기도록 자식들에게 효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소리 글자가 훈민정음"인 것이라 밝혔다.

그는 20여 년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찾는 긴 여정에 나섰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史實)이 아니기에 기록을 통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과정에 대한 진실을 접근 해 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세종실록에 숨은 훈민정음의 비밀

우세종 (지은이), 모아북스(2024)


#훈민정음#한글#세종대왕#신미대사#복천암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헌법에 보장된 정의의 실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실천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이 지속될 때 가능하리라 믿는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토대이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 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