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고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성큼 들어선 시월의 첫 토요일인 5일, 충남 예산에서 '동네 시끌시끌한' 작은 축제가 열렸다. 행사 이름은 '2024 달팽이 인문학 축제'.
예산군 인문학 그룹 달팽이가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주최한 이번 행사는 '대중음악으로 읽는 지역 문화'라는 타이틀로 예산읍의 엘피바 '엘피에 빠지다'와 삽교읍에 위치한 '힐데가르트의 정원' 두 군데서 1, 2부로 나누어 열렸다.
'엘피에 빠지다'는 예산이 고향인 이병민 님이 운영하는 예산 유일의 엘피바다. 가게에 들어서자 사방 벽면을 천장까지 가득 채운 엘피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게에는 약 4만 장의 엘피와 2만여 장의 시디를 비롯해 수천 장의 영화 포스터 및 영화 필름 등을 보유하고 있다고 이병민 사장은 소개했다.
오후 세 시부터 이곳에서 '여율의 신민요-김민기를 기리며'를 주제로 양진호 인문학교육연구소장의 강연이 열렸다. 철학자의 강연이라 해서 김민기가 가지는 사회, 역사적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들려줄 줄 알았는데, 막상 듣고 보니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재미있는 음악 강연이었다.
양진호 소장이 직접 기타로 반주를 하고 청중이 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가게에 있는 김민기의 엘피들을 질 좋은 진공관 앰프로 들어보기도 했다. 강의 제목인 여율은 동양 음악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악보에 맞춰 정석대로 연주하는 것을 율(律)이라 하고, 율을 따르되 악보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이 여(呂)라고.
그런데 김민기 선생은 율보다는 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고 양 소장은 분석했다. 그가 이병민 사장에게 부탁해 들려준 김민기의 목소리는 과연 음정이 상당히 미묘하게 흔들리는 구간이 많았다. 규칙을 벗어나 자유롭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소리였다.
악보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노래했던 사람
예산군 시니어 연주팀 '소리랑'의 기타 공연이 끝나고 삼삼오오 저녁 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7시에 다시 '힐데가르트의 정원'에 모였다.
'힐데가르트의 정원'은 중세 독일의 예술가이자 과학자, 철학자였던 힐데가르트 수녀의 농업과 생명에 대한 가치관에 매료되어 예산으로 귀농한 박연우 님이 운영하는 화훼 농장이다.
그녀가 직접 청을 담가 만들었다는 향긋한 겹벚꽃차는 저녁이 되어 쌀쌀해진 날씨에 움츠러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이어 정원 가운데에 마련된 야외 무대에서 현영애 감독의 영화 < NOW, 머리에 꽃을 >이 상영되었다. 2009년에 제작된 이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문화혁명이자 실패한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히피 문화가 실은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75분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함께 한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서 현 감독은 "히피가 한국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에 열정적으로 작업했다"며 "여러 가지로 힘든 여건이었지만 행복하게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 NOW, 머리에 꽃을 >은 2011년 제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고, 광주 인권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현 감독은 영화가 끝날 즈음 영화에 출연하고 촬영에 도움을 준 지인들 중 고인이 된 이들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일교차가 큰 가을밤 야외 무대여서 꽤 추웠지만, 맑은 날씨 덕에 또렷이 보이는 밤하늘의 별이 낭만적인 정취를 돋웠다. 영화 출연자이기도 한 인디포크 가수 '인디언 수니'의 아름다운 기타와 노래 공연을 끝으로 이날 행사는 막을 내렸다.
서울 중심이 아닌 지역의 담론을 다양한 목소리로 다룰 것
달팽이 인문학 축제는 앞으로 매년 새로운 주제를 문화예술로 푸는 행사를 마련할 계획이다. 지역의 담론을 지역의 목소리와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민주적인 대화의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게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에 문제 의식을 갖고 지역의 관점에서 다양한 담론을 다루겠다는 것이 축제를 기획하게 된 의도다. 이날 양진호 소장의 강연에서도, 그간 기존 매체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김민기의 지역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행사 관계자는 "지역은 획일화되어 있고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달팽이 인문학 축제를 통해 새로운 목소리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면서 "그래야 지역 소멸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