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읽었던 책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지 않는 책 중 하나는 어떤 '명언'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었다. 한 장 한 장을 펼칠 때마다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말들이,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었다. 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 밑줄을 그었는데... 그러다 결국에는 몇 장 읽지 못한 채 덮어버리고 다시는 읽지 못했다.
이상했다. 분명 반짝거리는 말들만이 모여있었는데 스쳐 지나갈 때는 무척 달콤했으나, 그 잠깐의 달콤함이 끝이었다. 어떤 문장들도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고 결국 소멸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글을 읽고, 또한 쓰다 보니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진정 좋은 글이란 수없는 좋지 않은 으로 치부될 만한 평범한 문장들의 든든한 배경이 있었을 때 더 빛나게 되는 것이라는 걸. 그런 평범한 문장이 하나도 없는 좋은 문장들만 모아놓은 책은 오히려 좋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아이러니를 말이다.
삶의 매 순간이 명언과 같이 빛나길 바랐는데
나는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밑줄을 긋고 싶었다.
삶의 매 순간이 명언과 같이 빛나길, 하루하루가 드라마처럼 극적이길, 영화처럼, 음악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답길, 이런 것들을 꿈꾸고 바라며 그렇지 않은 평범한 순간들, 반복되는 일상들은 지루하고, 무색무취하다며 건조하게 대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건 미련함이었다. 책의 모든 페이지에 굉장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미련하듯, 어찌 삶의 모든 페이지에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페이지마다 다만 몇 개의 밑줄을 그을 수만 있어도 좋은 책이라 여겨지듯, 내 삶도 그렇게 가끔 한 줄이라도 밑줄을 그을수 있다 하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람이 언제부터 필요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정신 없이 시작되는 하루, 두 아이를 바쁘게 챙겨서 쫓아내듯 등원, 등교 준비를 시키고, 덩달아 빨라진 호흡으로 아침 운동을 한다.
그 뒤 내가 일하는 교습소에 가서 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하고, 간신히 착륙을 마치고 커피 한잔을 내리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해야할 작업들을 하고, 거의 같은 메뉴로 점심을 챙겨 먹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른들을 가르치고, 오다가다 틈틈이 아내와 아이들을 마주치고, 눈빛을 나누고,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잘준비를 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잠이 들고.
화려함이란 전혀 없는, 밑줄 그을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함으로 가득 찬 날이었는데, 오늘은 그 평범함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을 경험했다.
특별한 문장이 없는 듯해 보이는 하루였지만, 그 평범한 문장들로 구성된 시간들 하나하나를 사랑할 때, 특별한 문장들로 가득했던 시간들 보다 더 나를 채워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밑줄 그을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간이었지만, 모든 곳에 밑줄을 그어도 될 것 같았다.
평범한 순간들이야말로 사랑하는 순간에 특별한 빛이 나는구나. 삶의 매 순간에 밑줄을 그을 수 없어도 괜찮구나. 살아있는 오늘, 그 자체가 아름다운 밑줄 한가득 이구나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