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영 작가를 만나러 '오름오르다' 공방에 가면 작은 마당에 독특한 작품이 설치돼 있었다. 박 작가한테 그 작품에 대해 물으면 "어 그거 고 작가가 만든 거야"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 작품을 보면서 고 작가는 '예술 작품을 뚝딱뚝딱 잘 만드는 작가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지난 10일 제4회 오름오르다 회원전이 열리는 이천아트홀 갤러리에서 고호석(58. 오름오르다 대표)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제주에서 미술 영재 소년으로 불렸다고 들었다. 부모님은 반응은 어떠셨나?
"부모님은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가 예술을 하면 삶이 힘들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던 중3 어느 날이었다. 오른쪽 눈이 볼펜에 찔린 사고가 있었다. 곧바로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고 1년여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실명됐다.
요즘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하릴없이 지내고 있는데 강요배 작가님께서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저희 아버지를 설득해주셨다. 강 작가님은 제주 출신으로 저희 외삼촌이다.
2024년 호반미술상을 수상하셨고 미술(예술) 작품을 통해 제주 4·3 사건 등 제주의 역사적 사건과 제주의 자연 등을 표현하신다. 외삼촌 도움으로 퇴원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예술고등학교 시험을 봤다.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고 학교생활을 충실히 했다."
- 지금 눈은 어떤가?
"실명 상태, 그대로이다. 한쪽 눈으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 서양화가, 설치미술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도예가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셨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대학원의 미학 시간으로 돌아가야한다. 당시 미술평론가로도 명망 높은 교수님께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책을 교재로 우리나라 미술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 그때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서양화에 너무 집중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서양화의 끝이 어딘가 한 번 가보자 할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하고 작업했는데 우리 것에 대한 중심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대학원생들이 한국 미술 분야를 나눠서 일정 기간 깊이 공부한 후 발표하고 토론하는 활동도 했는데 이때 우리 미술 역사가 길고 분야 또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방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가장 한국적인 것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을 찾기 위한 고민과 방황이 시작됐다. 그것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고호석 작가는 경원대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도자에 입문한 지 25년째. 2010 인천 세계 도시 미술 초청 국제교류전, 제51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입선, 제52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장려, 2023 경상북도인물도자전 특선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고 전시를 열었다.
-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이십 대부터 시작했는데 그 후 어떻게 보냈나?
"한국적인 것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서양화를 작업을 했고 인간의 순수와 양면성을 찾아보는 다양한 실험 설치작품 작업도 많이 했다. 예컨대 약 3m짜리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철사(와이어)로 연결하여 공중에 띄워 놨다. 철사 첫 부분에 흰색 종이비행기, 중간엔 회색 그 다음엔 검은색이 벽에 박힌 형상으로 설치했다. 순수를 상징하는 종이비행기를 날리면 어느 지점까지 날아가다가 결국 땅에 떨어진다. 이 작품을 통해 나의 중심을 찾아보자는 시도를 했다.
미술학원을 운영한 적도 있다. 병원 건물, 박물관 등 인테리어 공사도 많이 했다. 공사를 수주한 업체가 부도 난 바람에 연쇄적으로 저도 부도가 나서 공사비를 받지 못하여 힘든 시기를 보낸 적도 있다. 그 당시 같이 일하는 분들 인건비를 드리지 못하여 공동묘지 바로 아래 호숫가에서 한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그땐 공동묘지도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더 무서웠다. 그렇게 지낸 후 지인의 도움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빚을 조금씩 청산했고 같이 일했던 분들과의 관계도 회복됐다."
- 20대에 어안렌즈에서 착안해 대형 원형 캔버스를 직접 제작했다고 들었다.
"1990년이었다. 대형 원형 캔버스(2m 짜리 원형 캔버스를 5개 연결함)를 직접 제작했고 그 캔버스에 작업을 했다. 화가들은 보통 사각 캔버스에 작품을 그리는데, 저는 이 캔버스가 틀에 박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틀을 깨고자 고민하는 과정에서 원이 디자인의 중심이자 가장 완벽한 형태라는 지점에 이르렀다.
또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카메라로 사진 촬영하는 것을 즐겨하여 렌즈에도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원과 어안렌즈가 연결됐다. 어안(魚眼)렌즈는 카메라 촬영 범위가 180도 이상인 초광각 렌즈로, 물고기가 물속에서 수면 위를 올려다볼 경우 상향 시야가 180도 이상이며 물 위의 풍경이 원형으로 보이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 한국적인 미(美)의 중심을 찾았나?
"찾았다. 어느덧 25년 전이다. 박채영 작가를 만나고 한국적인 미의 중심에 대한 고민이 해결됐다. 바로 도자기였다. 도자기는 흙을 물레에 올려놓고 중심을 잡으면 형태가 잘 나오고 중심이 흐트러지면 안 나온다. 도자기는 서양화 등 다양한 분야와 접목이 가능하다."
- 처음 흙을 만졌을 때 어땠나?
"흙이 자꾸 부서지거나 형태가 비틀어졌다. 그때 '나는 흙을 잘 다루지 못한 사람이라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했다. 흙의 형태가 잘 나오지 않은 원인을 나한테서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혼자 새벽까지 계속 작업하면서 흙이 너무 말라 있거나 물기가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흙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흙을 만지고 흙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의 삶과 어떤 연결 지점도 찾았다."
- 어떤 연결점이었나?
"도자기 한 점의 탄생 과정이 나를 찾아가는 과정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도자기는 흙으로 기물을 만든(성형) 다음 어느 정도 건조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후 기물을 뒤집어서 조각도로 굽을 깎고 다듬는다. 그것을 가마에 넣어서 불을 때서 구운(초벌)뒤 꺼내어 식힌다.
그것에 유약을 입히고 건조 후 또 가마에 넣어서 불의 온도를 1,250도~ 1,260도까지도 올린다. 기물은 뜨거운 불 안에서 구워질 때까지 견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어 온도가 식을 때까지 또 기다려야 작품이 된다. 돌아보니 지난한 이 과정이 나를 찾아가는 과정과 연결됐다."
- 작년 이맘때쯤 전시한 작품도 기억에 남아있다. 꼬마가 기찻길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가는 작품.
"그 작품 제목은 '나에게로의 물음'이다. 열차는 출발지와 중간 정착지 마지막 종착지 등을 알 수 있다. 이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인생 특히 내 인생은 어느 만큼 와 있는지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지 언제 그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인생에 대한 물음이었다."
- 작가님은 지금 인생이나 예술세계에서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것 같은가
"중간 정도 온 것 같다. 갈 길이 아직 멀다."
-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예술이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까."
- 2024년 올해 10월에 선보인 전시 작품도 의미심장한 뭔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오 엑스(O X)인간'이다. 처음엔 제목을 '인간 그 물음의 한계론'이었는데, 바꿨다. 대학생 때, 늦은 오후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서울 어느 곳을 걸어가고 있는데 내 눈앞에 광활한 하늘과 구름이 펼쳐졌다. 그 하늘과 구름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했다. 그리고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이 마음에 와 박혔다.
당당하게 서 있는 높고 거대한 타워크레인이 기둥과 X 모양 등 서로 다른 모양으로 엮어져 있는 것도 알았다. 이러한 장면을 언제가 작품에 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강요배 작가님께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한 작품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하늘, 타워크레인, 원, 그리고 기존에 설치작품 소재인 종이비행기 등을 결합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물음을 제시하려고 했다. 나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 이천의 작업 환경은 어떤가?
"제일 좋은 점은 '교통'이다. 서울에서는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도로나 길에서 멈춰 있을 때가 많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꽉 막힌 도로에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게 너무 아까웠다. 이천의 도로는 비교적 한산하다. 이동 시간이 줄어서 작업할 때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천에서 타 지역으로 갈 때도 용이하다."
- 앞으로 작업 계획은?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변함없다. 다만, 이전 작품보다 좀 더 재미있는 작품을 연구하고 연출하여 내년에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고호석 작가는 굴곡진 삶에 굴하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 그것을 작품으로 구현해 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서양화 속에 가장 한국적인 정신을 담았고 도자기에 현대적 정서를 담는 시도도 했다. 그는 그러한 작품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도 묻는다. 당신 삶은 괜찮냐고. 당신은 지금 어디 쯤에 서 있냐고. 그를 주목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