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10월 중순의 주말(12일 토요일)에 임실 오수와 남면 고향 시골길을 가을바람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오수 의견설화 발상지 옆의 의견공원을 출발하여 군곡마을, 봉천마을과 오수역(현재)을 거쳐 총 11.7km(3시간 30분)의 시골길 걷기 여정이었다.
임실 오수는 예로부터 이 지역의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로 시대에 따라 이곳을 통과하는 길(도로)이 차례로 발달하였다.
이날 고향 시골길 걷기를 통하여 조선 시대의 오수역참을 통과하는 통영별로(統營別路)의 옛길 흔적, 근대화 시대의 신작로, 전주 남원 간의 17번 옛 국도와 현재 국도, 전라선 옛 철도 선로의 흔적, 순천완주고속도로와 현재 KTX가 달리는 철도 선로 등 6가지의 시대에 따라 진화한 여러 길을 확인하고 이 지역의 역사 문화의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었다.
천 년의 유서 깊은 신라 시대 오수개 설화를 바탕으로 '오수' 지명이 생겼고, 고려 시대 이곳에 오수역(역참)이 운영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그 기능이 확대되어 오수역( 도찰방역, 역참)으로서 멀리 남해안의 여수까지 많은 역참(驛站)과 역도(驛道)를 관장하였다.
오수 의견설화의 발상지인 오수천의 상리 마을에서 군곡 마을까지 2.8km의 고향 시골길 걷기 첫 구간을 출발하였다.
임실 오수에는 오수역(獒樹驛)이 세 곳 있다. 첫째 오수역은 조선 시대의 교통 통신제도였던 역참으로 중앙과 지방 관아의 공문을 전달하였고, 관리들이 부임하거나 여행할 때 다음 역참까지 필요한 말을 마패를 보고 공급하였다. 조선 시대의 역참 제도는 1895년에 폐지되었고, 현재는 오수 역참지(驛站址)의 비석만이 남아 있다.
둘째 오수역은 철도역이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조선 시대 통영별로의 길을 따라 신작로가 설치되고, 철도가 부설되어 1931년에 전라선 오수역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제 동물인 말을 교통 수단으로 하는 역이 아니라, 증기기관차인 철마가 철길을 달리는 시대가 되고 오수역은 70년 동안 전라선 기차역으로 기능하였다.
이 오수역(구역)은 2004년에 전라선 선로 직선화와 전철복선화 공사가 끝나고 서쪽으로 시가지를 벗어나 500m 이동하여 셋째 오수역 시대가 열리고 KTX 열차가 달리고 있다. 오수역(구역)은 옛날 역사와 선로를 보존하고 디젤 기관차와 객차가 전시물로서 서 있다.
남악 교차로와 남악 마을을 지나고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가서 군곡 마을에 도착하였다. 군곡 마을은 이곳 산줄기가 군신조회(君臣朝會, 임금과 신하가 아침에 조회함)의 명당 형국이어서 군지실이라고 군곡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군곡 마을에서 봉천 마을까지는 2.7km 구간이다. 그런데 이 구간은 길을 걸으면서 고개를 넘고 하천 교량을 건너고 황금 들녘의 논길을 지나며 자연과 조화로운 풍경을 이루는 6가지 길의 형태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군곡 마을에서 고갯길(방고개)을 오르면 고갯마루에 육중한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고, 그 위에 도로 상판이 올려져 순천완주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둔남천 교량을 앞두고 들녘을 전라선 고가 선로 위로 KTX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둔남천 제방 위치에 조선 시대의 통영별로로서 역참의 말이 달리는 역로(驛路)가 있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실현의 관아 옆을 지나는 통영별로는 성수지맥 산줄기 능선의 고개인 말재를 넘어 계곡 골짜기를 따라 둔남천을 거의 직각으로 바라보며 내려왔다. 둔남천 교량을 건너니 바로 17번 국도가 길게 냇물을 따라 내리뻗고 있다.
봉천 들녘은 농지의 경지정리가 시대상 앞선 곳이며, 이 들녘 가까운 마을들은 1970년대 새마을사업 최우수 마을들이었다. 이 봉천 들녘에 들댕이(들당이, 평당 坪堂), 평당원천(坪堂院川) 등 남아 있는 옛날 지명은 이곳이 예로부터 넓고 비옥한 들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 평당원천(둔남천)에 연산군 때에 홍길동의 활빈당 무리가 나타났다가 지리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선조 때 허균(1569~1618)이 지은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품 속 주인공이 홍길동인데, 연산군 때에 실제 인물 홍길동이 있었다.
봉천보건진료소를 지나 농로를 한참 걸으니 봉천정미소 앞에 농로가 시원스레 나타났다. 이 농로가 70년 동안 전라선 철도의 옛날 선로 자리이다. 선로의 자갈, 침목과 레일 등 철도 시설이 철거되고 철도의 노반은 농로로 활용하여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다.
봉천 마을에서 현재의 전라선 철도 오수역을 지나서 오수 의견설화 발생지까지 되돌아오는 길은 6.2km의 구간이다.
봉천 마을을 통과하여 성수지맥 산줄기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말재를 넘어 오수로 향하는 옛날의 신작로이면서 예전의 17번 국도가 나타난다. 비포장 산길이다.
성수지맥의 고개 말재에서 조선 시대의 통영별로 걷는 옛길은 고개 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가능한 최단 거리로 평지로 내려와서 둔남천의 흐름을 따라 걷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말재를 넘는 신작로는 말재 정상에서 오촌 마을까지 비스듬히 도로의 경사를 낮추어 내려오니 거리는 훨씬 길어졌다. 수직 계단은 오르기에 힘겨우나, 지그재그형 나선형 계단은 경사가 낮추어져 오르기가 훨씬 수월해지는 이치이다.
상신 마을 부근의 둔남천 하천이 흐르는 험애 부근을 순천완주고속도로와 KTX가 달리는 철도 선로가 지나고 있다. 옛날 통영별로, 전라선 옛 철도 선로가 지났던 곳이며, 옛날의 신작로인 예전 17번 국도가 현재도 오수로 들어가는 길로 활용되고 있다.
이 지역 상신 마을 부근에, 시대에 따라 발전했던 6가지 길 중에서 5가지가 지나고 있고 현재의 17번 국도는 다른 곳으로 우회했다.
현재의 오수역을 지나서 오수 시가지로 들어섰다. 오수 지역은 오수 의견 설화와 오수역참에 역사적 바탕을 두고 있다. 오수 역참은 고려 시대부터 역참으로 기능하며 많은 말을 기르고 관리들과 많은 인원이 상주하는 일종의 특별행정구역이었다.
오수 역참의 관아에는 여러 기능의 건물도 많았고, 2층 누각도 있었던 듯하다. 이규보(1168~1241)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그가 한때 오원역(관촌)을 지나 남원으로 가면서 오수역에 잠시 머물러 누각의 벽에 걸린 어떤 시를 보고 차운(次韻)하여 다음과 같은 오언율시를 남겼다. 고려 시대 오수역(역참)의 한가로운 자연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烏原侵午出 (오원침오출)
獒樹片時留 (오수편시류)
閑鹿眠深草 (한록면심초)
幽禽浴淺溝 (유금욕천구)
山供滿目畵 (산공만목화)
風送一襟秋 (풍송일금추)
再入帶方國 (재입대방국)
天敎飽勝遊 (천교포승유)
오원(역참)에서 한낮이 지나 출발하여
오수(역참)에서 잠시 머물렀네.
한가로운 사슴은 풀숲에서 잠들고
그윽한 새는 얕은 물가에서 몸을 적시네.
산은 눈을 즐겁게 하는 그림이고
바람이 부니 옷깃에 가을이 깃드네.
또 다시 남원 땅(대방국)에 들어왔으니
하늘은 마음껏 경치를 즐기라 하네.
지형을 따라서 구불구불 천천히 흐르는 길에서, 하늘로 고가도로가 나고 산맥 속으로 땅속을 터널이 수 km까지 달리면서 고속도로와 KTX 철도 선로는 직선화 되고 길 위에 머무는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다리로 한 발 한 발 걷는 길에서 자동차와 열차의 닫힌 공간에 몸을 싣고 달리는 길이 교통의 중심이 되면서, 이제 길동무란 단어도 없어져 간다.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어쩌면 함께 삶을 여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산줄기 따라 강물 따라 흐르는 길에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길동무들은 함께 성장하기도 했다. 길동무가 함께 도보 여행하는 모습은 자연과 어울리는 한 폭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임실 남면 고향 시골길의 3시간 30분 (11.7km) 걷기 여정을 마쳤다. 고향 시골길 어느 구간에는 수천 년 전부터 형성된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 오랜 길에 흔적조차 희미해진 소중한 역사와 이야기들은 이 땅의 인문학적 문화 자산이다.
한 줄기 옛길이 다섯 줄기의 여러 길로 진화한 이야기를 찾아본 오수 남면의 고향 시골길이었다. 길동무와 함께 가끔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줄기를 둘러보며 성큼성큼 걸었다면 더욱 좋았겠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블로그 티스토리(Tistory) '흘러가는(김진영)'에 실려 있는 '시골길 걷기(남면 고을길)'(16.9.29.목)의 경로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