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직 수료식 행사가 시작하기까지는 1시간도 더 남았다. 그런데도 그늘 한 점 없는 스탠드 좌석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새벽 내내 달려 내려온 경남 진주의 10월은 아직도 한여름이다. 준비한 꽃다발이 땡볕에 처지기 시작했다. 햇볕이 어찌나 강렬한지, 미처 양산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팔다리가 익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른이 돼가는 아들

공군 861기 수료식 아들이 약 5주간 기초훈련을 마치고 이등병이 되었다.
공군 861기 수료식아들이 약 5주간 기초훈련을 마치고 이등병이 되었다. ⓒ 김경희

멀리서 함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소대별로 구령에 발을 맞추며 행진하는 군인들이 텅 빈 운동장을 메우기 시작했다. 발걸음에 맞춰 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들이 저 곳 어딘가에 있겠구나. 바쁘게 눈을 굴려보지만 어디에 있는지 당최 찾을 수가 없다. 카메라 줌을 최대로 확대해도 봤지만, 아들과 비슷한 귓불과 턱선도 보이지 않았다.

군악대의 재간 넘치는 공연이 끝나고 수료식이 시작되었다. 천 명이 넘는 인원이 열중 쉬어, 경례를 할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절도 있고 웅장했다. 입소식 때 봤던 우왕좌왕하던 모습들은 없어지고 군기가 바짝 들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영락없는 군인의 모양새다.

식이 끝나고 부모들이 운동장으로 아이를 만나러 들어가기 시작하니 네모진 대열이 이내 흐트러졌다. 나도 재빨리 아이가 있을 법한 곳으로 가서 찾기 시작했다. 이미 만난 가족들과 동기들끼리 모여 사진을 찍는 무리들을 보니 마음이 바빠진다.

잠시 후, 낯익고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하얗고 뽀얗던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타버렸지만, 모자 아래로 보이는 눈, 코, 입, 턱선까지 모두 아들 것이었다.

"승혁아~"
"엄마~"

나를 보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나는 꼭 안아줬다. 바스락거리는 새 군복에서 아들의 달큼한 냄새가 배어 나왔다.

"첫날 엄마, 아빠,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자면서 울었어요."
"유격 8번을 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서 목에 감각이 없어져요."
"마지막 날, 비가 와서 행군이 취소됐어요."
"소대장님하고 같은 방 동기들이 너무 좋았어요."

아들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쉴 새 없이 얘기했다. 낯선 곳에서 가족을 그리워하고 다가올 일을 걱정하면서 첫날밤을 보냈구나. 낯선 동기들과 생활하고 훈련을 하면서 함께 마음을 나누며 도와줘야 잘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구나. 때론 엄하고 자상했던 소대장님을 존경할 줄도 아는구나. 뿅뿅 구멍 뚫린 사격 훈련 쪽지와 성적표를 보여주는 걸 보니, 자랑스럽고 뿌듯한가 보구나. 마침내 너도 어른의 길로 들어섰구나.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른이 되던 때

내가 아들 나이쯤 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19살 되던 해 스산했던 3월, 병이 깊어졌던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엄마와 나는 친가에 내려가 있었다. 새벽녘 다급하게 부르는 할머니와 엄마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랑 잘 살아"라며, 가쁜 숨을 쉬며 아빠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그 말과 장면이 아직도 내 눈에는 선명하게 그려진다.

외삼촌과 이모들은 홀로 남겨진 엄마를 잘 지켜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올라오던 그 길이 나의 어른의 길이었다. 가족을 잘 돌보겠다는 다짐,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안은 채 떠밀리듯 들어섰던 길이었다.

요즘 힐링 예능 프로그램인 <삼시 세끼>가 내겐 생존이었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반지하 집에서 마음이 편하길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그렇게 늘 마음 졸이며 살다가 점차 햇빛이 온전히 드는 일층으로, 3층으로 조금씩 넓고 높은 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때도 월급은 모이기가 무섭게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조금씩 살림살이를 일궈가는 맛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는 새 소망이 생겼다. 내 아이들은 먹고사는 걱정이 없기를, 형편 때문에 원하는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아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쪽잠을 자며 젖을 물리고, 아이가 엎드려 자면 숨이 막힐까 다시 뒤집어주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는 것은 예사였다. 밤새 자지 않고 울면 어찌할 바를 몰라 아이를 차에 태워 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폐렴이니 당장 입원시키라는 의사 선생님 말에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던 기억도 난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나름의 교육서들을 읽으며 불안함을 달랬는데, 정작 아이는 나 보란 듯이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다녔다. 회사 일에 신경을 쓰느라 아이의 학업을 일일이 봐주지 못해 미안했는데, 아이는 오히려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고 말해줬다.

"지금까지 저희를 키우기 위해 고생하신 엄마, 오랫동안 회사 다니시면서 정말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저는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이제 엄마 쉬고 싶으신 만큼 쉬셔도 된다고 생각해요. 사랑해요. 늘 건강하세요. 저도 군대 건강하게 다녀올게요."

아들은 군대에 가기 전 내게 직접 손글씨로 카드를 썼다. 마침 당시 나는 퇴사의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코끝이 찡해왔다. '아~ 아들도 내 어려움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 그걸로 되었지.'

마음속 켜켜이 쌓였던 묵직한 것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를 키운 든든한 뒷배

 아이가 없었다면 한 생명을 키우는 일의 숭고함을 알기나 했을까.(자료사진)
아이가 없었다면 한 생명을 키우는 일의 숭고함을 알기나 했을까.(자료사진) ⓒ adroman on Unsplash

나는 내가 아들의 뒷배가 돼주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든든한 뒷배는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나 보다. 아이가 없었다면 한 생명을 키우는 일의 숭고함을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부족해도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아이, 잘 크는 아이 덕분에 내가 욕심내어 오랜 기간 일할 수 있었다.

엄마의 지나온 길을 응원하고 인정해줘서 지금의 안식년을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아들 덕분에 내가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은 나처럼 떠밀리지 않고 스며들 듯 어른이 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휴가를 마치고 아들과 나는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펼쳐질 아들의 길은 스펙터클한 액션 영화가 펼쳐질까? 아니면 사랑과 슬픔이 가득한 로맨틱 영화일까?

그게 어떤 장르이건 아들이 부디 당당히 즐기며 걸어가길 바란다. 앞으로 나의 길은 '힐링 예능'이 되었으면 한다. 아들이 어른의 길을 가다가 힘들면 언제든 와서 쉴 수 있는, 삼시 세끼 편안한 곳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공군엄마#진주공군기본군사훈련단#공군861기수료식#어른의길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상에서 얻는 영감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