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한글 반포 578돌이자 주시경 선생 서거 110주기이다. 이를 기념하여 세종시와 한글학회는 주시경의 한글운동과 그 후속 역사를 기리기 위해 19가지 발자취를 전시하고 있다.
수많은 발자취 가운데 19가지 발자취로 정리한 것은 10월 9일 한글날의 상징성을 위해 '10+9=19'로 숫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10월 8일(화)부터 세종시청 1층에서 전시하고 있고 10월 31일(목)까지 볼 수 있다.
내용은 한글학회에서 구성하고 기본 원고는 내가 맡아서 작성했다. 입체정보 그림은 강수현 작가 솜씨로 이루어졌다. 주시경 연구의 권위자인 리의도 교수와 한말글 운동의 권위자인 리대로 한말글문화협회 회장이 자문을 맡았다. 19가지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1876.12,22 주시경 선생,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다
2. 1894.11.21. 고종이 한글을 진정한 나라글자로 선언하다
3. 1896.4.7. 최초 한글전용 신문,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다
4. 1906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하다
5. 1907.7.1. 상동교회에서 국어강습소를 열다
6. 1908.8.31.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다
7. 1910.6.10. '한나라말: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발표하다
8. 1911. 주시경과 제자들, ≪말모이≫ 편찬 시작하다
9. 1911-1913, 우리 글자와 우리말을 '한글, 한말'이라고 하다
10. 1910. 독창적인 국어문법을 세우다
11. 1926.11.4. 한글날(가갸날)을 제정하다
12. 1927,2, 한글 운동의 등대 ≪한글≫ 잡지를 펴내다
13. 1933.10.29. 한글 맞춤법 제정하다.
14. 1942.10.1. '조선어학회 수난'을 겪다
15. 1946.10.9. ≪훈민정음≫ 해례본의 최초 영인본을 펴내다
16. 1945-현대. 국어 교과서와 주시경을 기리는 책들이 간행되다
17. 1967. 주시경의 뜻을 잇는 단체들이 생기다
18. 2013. 주시경을 기리는 '주시경 마당'이 생기다
19. 2024.10. 세종시의 '주시경 선생과 한글 역사 전시'를 기리다(김슬옹 축시)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의미는 주시경 선생의 생애와 한글 업적을 입체 그림으로 제대로 조명했다는 것이다. 주시경은 세종 이후로 우리 말과 글을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한 국어학자이자 세종 정신으로 한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실천한 한글운동가이다. 우리 말글 연구와 교육과 운동으로 일제에 맞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킨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선생은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이 맺어지던 1876년에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914년에 3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처음으로 우리말 연구하기 시작한 1893년(17세)부터 21년간 그가 남긴 업적은 1446년 한글(훈민정음) 반포 후 450여 년이 넘도록 그 누구도 못 이룬 업적이었다.
전시물 19가지 발자취 가운데 주시경의 주요 업적은 첫째, 20세 때인,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최초 한글전용 신문,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한 것이다. 이곳에서 기자, 총무, 인쇄공 등 온갖 일을 하면서 우리 말글 운동과 연구를 본격화했다. 둘째는 1906년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한 것이다. 서유견문(유길준)과 같은 난삽한 국한문 혼용체가 만연한 시절에 한글전용으로 우리말 문법을 저술한 것은 한글 선각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셋째는 그가 31세 때인 1907년 7월 1일, 상동교회에서 국어강습소를 연 것이다. 주시경은 우리말을 교육으로 우리말과 글의 소중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국어강습소를 직접 세워 가르치기도 하고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가르치곤 했다. 책과 원고를 늘 보따리에 싸고 다니다 보니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생겼다.
넷째, 1908년 8월 31일 제자들과 함께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여 조직적인 한글 운동과 한말글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글학회는 116년이나 선생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다섯째는 1910년 6월 10일, 나라가 망하기 두 달 전에, '한나라말: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때는 이미 국권이 기울어진 때였으므로 우리의 정신과 말을 지키고 가꿔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을 것이다.
다섯째는 1911년 주시경과 제자들이 <말모이>(사전) 편찬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1914년 서거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조선어학회 후학들이 그 뜻을 이어 1947년에 첫 권을 낼 수 있었다. 여섯째는 1910년 이후 우리 글자와 우리말을 '한글, 한말'이라고 불러 근대 명칭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주시경은 1910년에 '한나라글', '한나라말'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한글, 한말'의 명칭의 씨앗을 마련했다. 그 뒤 '한글' 명칭은 1913년 '국어연구학회'를 '한글모'를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한말'은 1912년 국어연구학회 2회 졸업장에 처음으로 쓰였다.
일곱 번째 업적은 1910년 독창적인 국어문법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앞선 저술에서는 우리말 문법의 일부를 다루었지만 '국어문법'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이를 개정한 1913년 조선어문법에서는 '홀소리, 닿소리'와 같은 순우리말 학문 용어를 처음으로 쓰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의미는 주시경 사후 한글의 주요 역사를 2013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주시경 마당이 생기기까지 보기 좋게 정리했다는 점이다. 주시경 제자들은 조선어 강습 등으로 뜻을 이어가다가 1919년 조선어연구회로 조직을 재편하고, 1921년 널리 공표한 뒤 1926년에 한글날(가갸날)을 제정했다. 1927년에는 한글 운동의 등대 ≪한글≫ 잡지를 펴내고 이런 노력 속에서 1933년 10월 29일 한글 맞춤법을 제정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이 일어났다.
광복 후 발자취는 네 가지로 추렸다. 19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의 최초 영인본을 펴내 훈민정음 해례본을 온 나라에 최초로 공적으로 알린 것과 1945년 국어 교과서가 나오고 주시경을 기리는 책들이 간행된 것, 1967년 주시경의 뜻을 잇는 다양한 단체들이 생긴 것, 2013년 주시경을 기리는 '주시경 마당'이 생긴 것이다. 마지막 전시물은 주시경과 한글학회 역사를 기리는 필자가 지은 서사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역사를 통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여주어 누구나 그 역사와 의미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덟 번째 발자취에서 주시경이 제자들과 직접 만든 <말모이> 사전편찬이 1914년 주시경 서거로 중단되었지만 1929년 이극로 발의로 시작한 조선어연구회의 사전편찬 역사의 바탕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말모이> 원고 대부분 사라져 원고 내용의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1957년 최종 완간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보게 함으로써 역사의 통합적 인식을 바탕으로 종합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형을 설계, 디자인했다.
10월 8일 개막식에서 단식 투쟁 중인 최민호 시장 대신 참석한 김하균 행정부시장은 "한글문화 수도를 꿈꾸는 세종시에서 한글학회와 함께 위대한 한글 역사를 기리게 돼 기쁘다"라고 했다.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은 개막 인사말에서 "주시경 선생과 한글학회를 대부분 알지만, 그 세세한 역사를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세종시와의 협업으로 짜임새 있는 입체 그림으로 알리게 돼 기쁘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주원 회장은 개막식에 이은 특강에서 19가지 발자취 맥락을 자세히 설명해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날 특강을 경청한 세종시민 차우상 씨는 "대학교까지 10년 이상 국어공부를 했어도 이런 중요한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전시를 보고 한글에 대해 많이 알고 그만큼 많은 감동을 받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