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들 집단 이탈로 인한 의료대란으로 의미가 퇴색하긴 했지만, 저렴한 비용과 뛰어난 의료 품질을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 과연 의료협동조합이 필요할까?
그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었다. 10일 오후. '행복한마을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아래 의료사협)' 사무실 문을 열자 초로의 남성이 "전화 주셨던?" 하며 악수를 청했다. 김중성(68) 상무이사다. '이젠 좀 쉬었으면'하는 피로감이 주름진 이마에서 느껴지긴 했지만,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활력있는 인상이었다. 눈에 웃음기가 있어 인자함도 느껴졌다.
의료사협은 조합원이 돈을 모아 의사를 고용하는 형태의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따라서 병원 주인은 의사가 아닌 조합원이고, 병원 존재 이유 역시 의사의 영리가 아닌 조합원의 건강이다. 의료사협은 환자 진료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환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예방 활동을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목적은 의료사협 정관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행복한마을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과천·의왕·군포·안양지역 주민과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아 마을에서 건강과 의료의 주인이 되는 협동의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우리는 생명의 존엄성이 존중되어 차별과 소외가 없는 평등 의료 구현을 위해 노력하고, 사회와 자연의 건강함이 나의 건강함과 직결됨을 직시하여 상호 협력과 조화로운 관계 맺음을 위해 진력한다.
우리는 주치의와 적정진료를 통해 치유의 근본을 생각하고 사회자원을 절약하며 왜곡된 의료 제도의 개선에 앞장선다.
또한 건강 증진과 예방에 주력하여 건강 자치력을 향상시키고, 장애인·노인·취약계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지원하고 연계한다. 나아가 초고령사회에서 통합돌봄을 구현하기 위해 매진한다." (정관 전문)
이처럼 공익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의원이나, 종합병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민간의료기관이 고가 장비 도입 등을 통해 각종 편의를 제공하면서, 경쟁에 밀린 의료사협(의료생협) 성장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적인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의료사협이 필요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마을마다 병·의원도 즐비하고요. 의료사협은 의료 서비스 질이 낮았던 과거에나 필요했다는 말도 나옵니다."
연신 싱글거리는 얼굴로 말을 이어가던 그가 이 질문을 받자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와 나의 거리 1m 남짓, 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지나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차별과 소외가 없는 평등 의료사회의 구현이 목표
"택도 없는(터무니 없는) 소리입니다."
분명 '버럭'하는 것이었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있어 언짢거나 무안하진 않았다. 반박이나 추가 질문을 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침묵으로 응대하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접근성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예방보다는 치료 중심으로 돼 있어서 앞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는 않아요. 더군다나 노인 인구가 폭증하는 상태라 이대로 가면 건강보험 재정 또한 마이너스로 돌아설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우리 의료 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비판적 평가가 이어졌다. 그는 노인 돌봄이 사설 시장에 맡겨져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점을 비판하며 "그래서 우리 의료 시스템은 후진적인 것"이라고 못 박았다. 주치의 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의료 소비자들이 이 병원 저 병원 떠도는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또한 의료와 돌봄이 하나로 합쳐져 있지 않아 보호자 부담이 크다는 점도 언급했다. "요양 기관에 있는 부모에게 질병이 발생하면,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아니라 보호자가 시간과 돈을 들여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게 그 증거"라고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러면서 "우린 이미 주치의 제도를 도입·시행 예정하고 있고 노인에 대한 통합돌봄(의료+돌봄)을 시도하고 있으며, 치료와 함께 예방에도 힘쓰고 있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의료사협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 의료 시스템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은 의료사협 활동보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7년여 전 사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방보다는 치료, 근본적인 변화 필요"
"아내 강혜란의 영감으로 남편 김중성이 엮다"
그가 내게 건넨 책 부제목이다. 제목은 <아내의 암 투병과 교훈>(고다, 2019년).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은 암과의 투쟁이다. 그의 아내가 직접 쓴 투병기와 그가 아내를 돌보며 터득한 암 치료 방법이 주요 내용이다.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허점과 개선점도 담겨 있다.
그는 책 서문에 "비전문가가 쓴 암 치료 실패기"라 기술했다. "암 치료에 성공해서 얻은 교훈도 적지 않겠지만 실패로 얻은 교훈도 암 환자에게 더 값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라고 책을 쓴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적한 것이 병원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3분 진료 관행'이다.
"암으로 진단된 환자라도 진료 상담 시간은 3분 내외에 불과하다. 초기 암 환자건 3, 4기 중증 암 환자건 구분이 없다. 보통은 3분 길어야 5분인 상담을 통해 통합진료(다학제 통합진료)는 고사하고 당장 환자에게 닥친 이슈를 확인하기에도 벅차다. 진료 상담 시간을 대폭 늘리지 않고서는 진료 질이 높아지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책 406쪽-
그는 또한 책에서 다학제 통합진료가 필요하다 주장했는데, 다학제란 외과, 영상의학과, 재활의학과 등 암 치료를 주도할 전문의가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특히 중증 환자 치료를 위해 다학제 시스템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또 3기 이상 중증 암 환자도 건강보험 혜택을 적절히 받을 수 있는 방향의 제도개선도 제안했다.
그는 이 책을 치료 실패기라 설명했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하늘에 별이 된 아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로 읽혔다. 아내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이 책 곳곳에 녹아 있어서인데, 서문에도 있고 일기 형식으로 적힌 그의 아내 목소리에도 담겨 있다. 어쩌면 그는 책을 쓰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눈이 너무 오길래 남편에게 '길 조심해'라고 했더니...그런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사랑하는 말, 보통은 잔소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랑하는 말이래. 남편이 떠날 때 손을 다시 한번 잡고 '길 조심해'라고 했다. 남편은 잡은 손을 굳게 잡아 주더니 웃어준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지. 세상 그 무엇도 무한하지 않으니 이 아픔도 언젠가는 끝장이 나긴 나겠지." -책 182쪽, 아내의 일기-
"아내를 떠나보내고 나는 아직도 평정심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유물들을 정리하면서 복잡한 감정의 선들이 엉켜서...아내를 살려내지 못한 죄책감에 시시때때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물도 하염없이 흘렸다...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 남은 사람 또한 떠난 사람 못지않게 아픔을 안고 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이별이고 삶의 균형이 깨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실감을 가진 채 홀로된 미래를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책 13쪽-
"아내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을 쓸어 내리고"
김중성. 그는 행복한마을의료사협을 만든이다. 의료사협에 뛰어들기 전 그의 인생 궤적은 '노동운동가→벤처기업가'였다. 한 차례 옥고도 겪었다. 그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 후 대기업 연구소가 아닌 노동 현장으로 갔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위장취업을 한 것이다. 탄탄대로를 버린 이유를 묻자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면서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라는 담백한 답이 돌아왔다.
그의 노동운동은 험난했다. 재야인사와 학생 운동권이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5.3 인천 투쟁(1986년 5월 3일)'에 노동자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지명 수배를 당했다. 이 투쟁은 86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항쟁이 막을 내리면서 수배가 풀린 김중성은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몇 년 뒤인 9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노동자 동맹 기관지인 '노동자의 깃발' 필진으로 활동하다 구속, 1년 여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 뒤 '위장취업에 이은 구속'이라는 이력이 족쇄가 돼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과외 등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2000년께 전공을 살려 '벤처기업'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경험도 없고 돈 욕심도 없는 그에게 사업이란 게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그의 머리에 군대 생활과 버금갈 정도로 어려운 기억으로 남은 게 바로 벤처기업가로 산 10여 년이다.
"돈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오롯이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인데, 오히려 어렵게 장만한 집만 날려 먹고 말았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없고 무의미한 기간이라고 봐요. 돈을 벌어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제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아까운 시간이에요."
알고 보니 생태공동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뒤에 선택한 게 바로 의료사협이었다. 생태공동체와 형태도 유사하고 공익적인 목적도 있어 의료사협을 시작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니 전성기인 젊은 시절에 한 일, 즉 1막은 노동운동과 벤처기업이다. 직장인이 은퇴할 시기인 오십 후반에 시작한 2막이 바로 의료사협이다.
의료사협 창립 멤버답게 그의 직함은 꽤 묵직해 보이는 상무이사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상무이사지 사실은 의료사협 실무자다. 회원 관리에서 각종 행사 진행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으니 명함에 활동가나 실무자라 적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6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실무자로 일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종합해 보니 의료사협 바탕은 환자인 조합원이 병원의 주인이 되는 얼개였다. 의사보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환자를 건강 주도권을 움켜쥔 지극히 능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게 그의 설명인데, 듣고 보니 꿈같은 일이었다. 그의 인생 2막이 화려하게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긴 여운이 남는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