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보 국토종주의 꿈을 가졌을 때, 그동안의 통례였던 찻길인 국도를 따라서는 걷기가 싫었다. 그래서 2019년 사람이 중심이 되어 걸을 수 있는 도보길을 개척해 걸었다. 이 길은 <사람길 국토종주>라는 책으로 발간되어 소개되었고, 책은 이듬해 국토교통부의 '이달의 도서'로 선정되었다. 이후 이 길의 이름을 '사람길 국토종주 트레일'이라는 뜻의 'HANT'로 명명하였다. 지난해 공익법인으로 설립된 사단법인 '사람길걷기협회'는 국토종주에 뜻을 가진 한국인 모두가 걸을 수 있도록 HANT 운영과 보급에 나서고 있다. 이 글이 도보 국토종주의 의미를 이해하고 국토종주길에 나서고자 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기자말] |
우리 국토를 잇는 길은 본디 모두 사람길이었다. 조선시대의 9대로는 우마차가 지날 수 있었어도 어디까지나 사람이 중심인 길이었다.
지금은 모든 길이 차가 중심인 찻길로 변했다. 산업문명은 속도와 기능 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차만 허락되는 폐쇄된 길로부터 인간 소외와 소통의 단절이 일어났다. 사람이 중심인 사람길을 회복하는 것은 이 시대의 숙제이다.
사람길 회복을 위한 도보 국토종주길을 만드는 시도들이 있다. 사람들은 사람길을 찾아 백두대간길을 뚫었고, 4대 강변길과 해안길을 이었다. 그러나 이 길들은 산과 자연만 보거나, 아니면 강과 바다만 보며 걷는 길이다.
우리 땅의 일부는 볼 수 있지만, 우리 국토를 관통하는 도보길이 아니어서 국토종주의 본래 뜻인 우리 본토의 다양한 쓰임새를 보고 느낄 수가 없다. 지역과 지역을 이으며 지역마다 각양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유구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전통과 만날 수가 없다.
이제 다시 사람길... 기준 다시 세우기
진정한 의미의 도보 국토종주길을 열어야 했다.
그 첫 시도가 2019년 1월부터 2020년 5월까지 진행됐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출발점인 해남 땅끝을 기점으로 삼아, 대한민국의 최북단 고성 철책선까지 본토 중앙을 찻길인 국도가 아닌 사람길로 관통하며, 5개도 20개 시군을 경유하는 보도 국토종주길을 개척했다.
국토종주에 뜻을 둔 한국인이 모두 사람길로 걸을 수 있도록 이 길의 이름을 ' HANT ' (Human Path Across the Nation Trail)로 명명했다. 드디어 우리 국토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길, 지역과 지역을 잇는 도보길이 생겼다.
' HANT '의 길은 걸으면서 우리나라의 자연, 지리, 역사, 문화, 전통을 마주하는 길이다. 지역마다 각양의 실제 사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길이다.
한 배우가 국토종주를 했다. 영화도 찍었는데 물집 생기고 무릎 아프고 신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기훈련 같은 걷기가 전부이다. 말은 국토종주였지만 우리 국토를 보지 못하는 걷기였다. 지금까지 모든 도보 국토종주가 찻길인 국도를 따라 걸었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찻길이 아닌 사람길 루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HANT는 다르다는 한 예를 들어본다. HANT는 강진군이 핵심 스폿으로 꼽은 20곳 중 18곳을 경유한다. HANT는 완주가 목표가 아니라 진정한 우리 국토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길도, 찻길도 아닌 중간의 길... 날것의 길
이처럼 이 땅의 삶과 실제를 보기 위해서는 산만 보는 백두대간길도 아니고, 찻길만 보는 국도도 아닌 그 중간의 길, 마을과 마을을 잇는 사람길을 찾아 걸어야 했다. 해남 땅끝에서 고성까지 찻길인 국도를 따라 최단거리로 걸으면 700km가 안되지만, HANT는 30%를 더 걷는 946km이다.
가는 곳마다 경이로움에 가슴 벅차고 마음에 힐링을 얻으며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때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논밭길을 걷고, 마을길을 걸으며 실로 다양한 이 땅과 삶의 모습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HANT는 지금까지의 둘레길과도 다르다. 둘레길은 정제된 길이다. 숲과 산 둘레에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도보길을 닦고 필요하면 데크길도 설치해 일정 구간 자연과 벗하며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든 길이 둘레길이다.
하지만 HANT는 날것의 길이다. 우리 국토의 생김 그대로를 보고 느끼기 위한 길이다. 때문에 HANT는 길을 새로 만들어 걷지 않는다. 만들 필요도 없다. 우리 국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쓰임새 그대로 보고 느끼기 위해서이다.
다만, 우리 국토를 느낄 수 있다면 지자체가 만들어놓은 도보길을 최대한 활용해서 걷는다. 그렇게 지역과 지역을 잇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서 도보 국토대장정이 완성되는 국토종주 트레일이 HANT이다.
외국 사례... 일본의 장거리 자연보도, 국가가 관리하는 미국의 도보길
우리는 그동안 없었지만, 도보 국토종주 트레일의 외국 사례를 보면 가까운 이웃 일본의 경우, '장거리 자연 보도'란 이름으로 일본 전역을 종단, 횡단, 순환하는 보행자 중심의 길을 1970년대부터 조성해 이용하고 있다. 2022년 현재 총 2만 7783km의 자연보도가 설치돼 있고, 연간 6천만 명 이상이 장거리 자연보도를 이용한다.
6천만 명이 걷기여행을 통해 유발하는 경제효과는 천문학적이다. 가령 제주올레길의 경우 2020년 한 해 동안 약 360만 명이 제주 올레길을 걸었고, 4천억 원의 경제효과를 유발했다. 6천만 명은 그 20배에 가까운 경제효과로 일본 경제와 지역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
한편 미국은 하이킹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트레일이 존재하는데, AT, CDT, PCT, NCT 등 3,000km가 넘는 장거리 트레일을 포함해 8만 3000여 km에 달하는 자연 및 역사 내셔널 트레일(국가에서 지정 관리하는 도보길)이 있다.
미국이 하이킹의 성지처럼 된 것은 도보 순례길을 국가가 주체가 돼 관리하는 영향이 크다. 도보 순례길에 대한 신뢰와 걷기의 가치를 국가가 주도가 되어 함양하므로 기타 수많은 트레일의 중요성이 같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외국인들도 걷기여행을 위해 미국을 찾고, 수많은 도보 유동인구를 만들어 내므로 지역경제 활성화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국가는 내셔널 트레일을 관리할 뿐 아니라 '내셔널 트레일의 날'을 정해 기념하고 걷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통합 여행여권, 등급 및 인증 시스템을 운영한다.
또 영국의 National Trail, 뉴질랜드의 Walkway, 호주의 Walking Track, 독일의 Wandering Route 등 모든 선진국엔 도보 국토 순례길이 활성화돼 있다. 산업화의 그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도보길 유지와 확장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HANT가 불러올 기대효과
이제 우리나라도 사람길로서 도보 국토종주길을 가져야 한다. 일본은 '자연보도'라고 칭했지만 우리는 사람과 소통을 회복하는 더 많은 뜻이 담긴 '사람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이라면 외국의 산티아고 길을 먼저 걷는 것이 아니라 국토종주길을 먼저 걷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돼야 한다.
HANT는 지역을 연결해 우리의 미래를 여는 길이다. 즉 미래는 우리 국토에 대한 이해로부터 열린다. 국토를 걷는 것은 대한민국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을 사는 자부심으로 연결되고, 같은 국토를 사는 국민으로서 동질성을 발견하고, 지역을 연결하므로 지역 통합, 국가 통합의 에너지가 되어 국가의 미래를 여는 길이 된다.
또한 HANT는 한국적 환경·삶의 대표성을 갖는다. 즉 한국인의 삶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길이다. 국토종주 루트가 지나는 해당 지역은 한국인의 삶과 환경을 대변하는 중요한 의미로서 다가온다. HANT는 걷기 여행자 각자에게 그동안 몰랐던 우리와 국토에 대한 새로운 앎과 각성을 주는 새 기회를 열어주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인자를 제공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로써 도보 국토종주길의 기준을 제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또한 HANT는 지역 발전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증진시킨다. 걷기산업의 측면에서 부가가치가 큰 미래국가사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국토종주라는 거대 담론 안에서 지역의 작은 장소 하나까지 뜻이 살아나고 눈여겨보는 명소로 탈바꿈한다.
한 예로 제주 올레길의 수봉로를 들 수 있다. 수봉로는 제주 올레길이 생기기 전엔 아무도 모르고 길 이름도 없는 해변의 버려진 한 일부분이었다. 제주 올레길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면서 손으로 직접 돌을 치우며 길이 나고부터, 지금은 올레꾼들의 최애 생태탐방로로 손꼽는 길이 되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명소는 사람들이 걷는 사람길에서 끊임없이 새로 탄생한다. 관심은 유입 및 유동 인구의 확대로 이어지고 지역 발전으로 연결된다. 지역을 이해하는 기회는 국토종단 길 외에 다양한 지역 여행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외국인 걷기 여행자에게도 한국의 자연과 역사, 진면목을 알리는 자연스러운 기회의 장을 열 것이다.
스페인은 요란한 홍보가 아니라도 산티아고 순례길 하나로 연간 수조 원의 경제효과를 올리고 있다. 산이 70%이고 산마다 계곡물이 흐르는 금수강산의 나라이며, 한류 문화대국 한국을 상징하는 길로서 대한민국의 본토 중앙을 관통하는 도보 국토종주길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이제 '국토를 걷는다'는 말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의미로 읽힌다.
한국인은 지금 아스팔트나 회색 도시 위가 아닌 우리 국토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앞에 난제로 커온 막히거나 쪼개지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닌, 다 함께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이자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