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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도에는 무엇이 들어 있다고요?"

"해가 들어 있어요!"

"맞아요! 그러니 여러분은 해를 먹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해처럼 밝은 존재인 겁니다. 햇빛 덩어리인 거죠. 기억하세요. 햇빛 덩어리인 여러분은 1도 빠지지 않는, 완. 벽. 한. 존재입니다."

몸으로 하는 경험 훨씬 잘 기억하는 느린학습자들

 초등부와 중고등부 학생들이 만든 허수아비들
초등부와 중고등부 학생들이 만든 허수아비들 ⓒ 느린IN뉴스

한 달에 한 번, 경기권과 서울 지역 느린학습자 중고등학생들은 한 농부님으로부터 "너희들은 햇빛이고 별이고 하늘이고 우주"라는 말을 듣는다. 학교에서 이따금, 혹은 종종 투명 인간이 돼 버리곤 하는 느린 친구들이 이 공간에 들어서면 해처럼 환한 빛을 내뿜는 존재가 된다. '나'라는 존재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중고등 느린 친구들이 농촌 체험을 하는 이곳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독지리에 자리한 유기농 포도 농장 '스튜디오 흙'이다.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중고등 느린학습자 치유농장'이다. 이 프로그램은 '흙이 시를 만나면'의 농장 대표이자 농부인 이상배 씨가 화성시느린학습자부모회 '늘품'과 2023년 몇 번의 일회성 귀촌 체험을 진행한 후 학부모들의 지속적인 프로그램 요청으로 기획됐다.

올해는 화성 '늘품'만이 아니라 수원, 고양, 성남, 부천, 관악과 은평까지 경기권과 서울의 느린학습자들과 함께하는 체험으로 확대돼 매달 10가족 이상 30명이 넘는 이들이 참여한다. 스튜디오 흙을 통해 만난 중고등 느린학습자들과 부모들은 내 동네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에 인연의 실타래를 엮어 식연(食緣), 즉 먹는 인연으로 밥정을 쌓아가는 중이다.

총 9회차로 이뤄진 프로그램은 4월부터 시작해 10월까지 7회차가 진행됐다. 회기 당 체험 시간은 4시간이다. 4월에는 흙 고르기와 씨앗과 모종 심기를, 5월에는 모내기를, 6월에는 감자 캐기와 양배추와 배추 따기, 포도 봉지 씌우기를 했다. 7월과 8월에는 옥수수, 수박, 참외를 수확했다. 9월에는 샤인머스켓 따기와 배추 심기를 했고 10월에는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치유농장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체험이 생존 음식 만들기다. 부싯돌을 이용하거나 한여름에는 돋보기로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하고 된장국을 끓인다. 학생들이 직접 심고 딴 배추로 커다란 솥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배추전을 부치기도 하고, 삼복더위에는 삼계탕도 해먹는다.

한 달에 고작 한 번이지만 중고등 친구들은 스튜디오 흙에서 사계절의 농촌을 온몸으로 느껴가고 있다. 치유농장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프로그램으로 정착된 건 몸으로 하는 경험을 훨씬 잘 기억하는 느린학습자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몸과 머리를 같이 쓸 수밖에 없는 농촌 체험은 학생들의 인지력을 높여 주며, 무엇보다 협동 체험은 이들의 자발성과 사회성 향상을 돕고 있다.

이상배 농부님의 아이디어로 중고등 친구들은 나눔 활동도 한다. 각자 집에서 해온 반찬, 자신들이 딴 포도, 농부님이 준비해 준 쓰레기 봉투를 동네 어르신들에게 배달하는 것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치유의 공간

 가마솥밥과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다.
가마솥밥과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다. ⓒ 느린IN뉴스

'인지가 느려서, 몸이 느려서 농촌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하는 부모들의 의구심과 걱정을 우리 친구들은 매번 날려 보낸다. 학교에선 입을 잘 떼지 못하고, 발표도 잘 못하는 친구들이 스튜디오 흙을 만나면 사회자가 되고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춤꾼이 된다.

체험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은 사행시나 오행시를 짓는다. 10월의 제목은 '허수아비'다. 두 학생의 사행시를 들어보자.

:허수아비가 / :수수께끼를 냈는데 / :아저씨가 말했다 / :비계고기 먹을래?(중1)
:허수는 / :수학적 난제로 /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로 / :비극적인 난제다' (중2)

짧지만 학생들의 재치와 해학과 심지어 사색까지 돋보인다. 기량을 펼칠 마당만 주어지면 우리 친구들도 제 속에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는 것을 학생들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냥 묻히기엔 아까운 시들이어서 치유농장팀은 학생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나 사진을 곁들여 시화집을 만들 기획을 하고 있다.

치유농장은 학생들 뿐 아니라 부모님들에게도 치유의 공간이다. 중간에 합류한 성남시의 중1 어머니는 "치유농장의 가장 좋은 점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가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라며 "평소 학교라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답변에도 농부님의 칭찬과 엄마들의 환호에 어깨를 으쓱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학교와 일상에서도 활력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7회차 모두 참석한 화성시 고1 아버지는 "치유농장 프로그램을 통해 저희 가족은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유대감을 돈독히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멀리 서울 은평구에서 치유농장을 찾는 중2 아버지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며 이런 소감을 적어 줬다.

"'우리는 햇빛을 먹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야!'라는 말씀이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언제부턴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로 느끼고 있었구나 반성하게 됐답니다."

고양시의 중3 어머니도 비슷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아이도 저도 자연과 햇빛과 더불어 힐링의 시간으로 함께 추억을 만들고 있습니다. 함께하며 더불어 사는 삶과 느림 속 찬찬히 발전해 가는 아이들을 보며 늘 조급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방어하는 인류 최초의 도구, 돌 던지기
자기를 방어하는 인류 최초의 도구, 돌 던지기 ⓒ 느린IN뉴스
치유농장에 참여하고 있는 중고등생은 대부분 사춘기에 접어든 느린학습자들이다. 자신들이 어떤 엉뚱한 말을 내뱉거나 엉뚱한 행동을 해도 틀렸다고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창의적이라고 긍정해주는 농부님을 만나 중고등 친구들은 건강한 사춘기를 지나오고 있다.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흙을 만지고 농사를 체험하며 '나'를 찾는 좋은 경험을 쌓게 하는 치유농장 프로그램이 장기화될 수 있도록 사회적, 국가적 지원이 이루어지기를 참가 가족들은 바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느린IN뉴스에도 실립니다.https://www.slowlearner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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