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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은 자타공인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공항이다. 세계에서 시간당 운항 편수가 가장 많은 곳이 서울 제주 간 항공 노선이라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오는 항공편까지 제주국제공항은 1년 내내 북새통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인들이 비자 없이 출입국이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기도 하다. 같은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동시에 뜨고 내리는 모습은 여느 공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우리나라의 항공관제사들이 가장 꺼리는 근무지가 아닐까 싶은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공항 주차장엔 관광객을 기다리는 대형 버스로 빼곡하고, 인근 도로 역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도로를 넓히고 우회도로까지 냈지만, 늘어나는 차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차량이 늘어 도로를 넓혔는데, 넓혀진 도로에 다시 차량이 들어차는 악순환이다.

지금 제주도 곳곳에서 도로를 넓히는 공사 중이다. 도로변 삼나무 군락을 베어내는 구간을 지날 무렵, 버스 기사와 언쟁이 있었다. 그는 도로가 비좁고 교통량이 많아 사고가 빈번한 구간이라며 불가피한 조처라는 입장이었다. 환경단체의 반대는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는 거다.

그는 차량의 증가를 고정 상수처럼 여겼다. 듣자니까, 현재 제주도 내 등록 차량 대수가 상주 인구수를 추월했다고 한다. 국내 다른 지역에는 없는 '차고지 증명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도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제주도의 교통량에 기인한다.

'차고지 증명 제도'란 본인의 차고지가 있어야만 차량을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처음엔 주택가의 주차난 해소를 위해 도입되었지만, 애초 도내에 활용이 가능한 주차장이 부족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먼 타지의 주차장을 임차하는 등의 편법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현재 '차고지 증명 제도'를 폐지하거나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른 지역에 견줘 불공정하다는 인식에다 대중교통을 활성화하는 등의 교통 대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짐짓 모르는 척 하지만,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의 수를 제한하는 게 근본적인 대책이다.

제주도의 도로는 대형 버스와 렌터카에 점령당했다. 간선도로는 물론, 주택가의 이면 도로변까지 '허'와 '하'로 시작되는 번호판 차량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외지인 관광객의 소비가 지방 정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교통 문제를 두고 그들을 핑계 삼기도 어렵다.

전국에서 모여든 중고등학교 수학여행단도 한몫한다. 어느 곳엘 가든 서로 한두 번은 마주치게 된다. 대개 일정과 동선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현지 여행사에 위탁해 진행하는 수학여행이라면 볼거리도 먹거리도 즐길 거리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수학여행단이 찾아가는 식당의 주차장은 지방 여느 도시의 버스 터미널을 연상케 한다. 십여 대의 버스가 줄 맞춰 주차된 모습에서 이곳이 식당임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수백 명이 동시에 앉아 식사할 수 있는 규모의 식당이 전국에 과연 몇 곳이나 될까도 싶다.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와서 흑돼지 고기를 먹고, 카트를 타고, 서바이벌 게임 등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테마파크를 걷고, 디지털 쇼를 관람한다. 그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코스들이다. 여행 기간 중 하루쯤은 한라산 등반 일정을 추가해 제주도에 왔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 중에 '제주도다운' 건 거의 없다. 제주도 특유의 문화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거나 부러 제주도에 와야만 체험할 수 있는 활동이 없다는 뜻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인 제주도에 그런 위락 시설들이 마련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몇몇 순진한 아이들은 적어도 흑돼지는 제주도산 아니냐며 반문하곤 한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옆에 있던 친구가 비유까지 들며 자상하게 생각을 바루어준다. 그는 한 해 수학여행단의 점심 한 끼 분량만 공급하려고 해도, 제주도 전역에 축사가 지어져야 할 거라고 말했다.

 제주도 어딜 가나 꽂혀있는 '즐길 거리 홍보물'. 들여다 보면, 제주도다운 것들은 거의 없다.
제주도 어딜 가나 꽂혀있는 '즐길 거리 홍보물'. 들여다 보면, 제주도다운 것들은 거의 없다. ⓒ 서부원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시설의 수는 일일이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일례로, 카트를 타는 곳도 여러 곳이고, 테마파크라는 이름을 붙인 시설은 발에 치일 만큼 많다. 트렌드에 맞춰 새롭게 지어지는 곳도 있고, 기존에 운영되던 시설이 흉물스럽게 방치된 곳도 적지 않다.

압권은 골프장이다. 현재 제주도에는 서른 개 가까운 골프장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사통팔달 뻗은 도로의 어디서든 이름 뒤에 'CC'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한라산 정상부를 제외한 중산간 지역은 죄다 골프장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때 제주도는 청정한 자연환경과 이국적 정취로 상징되는 곳이었다.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됐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몸살을 앓은 지 이미 오래고, 남국의 정취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여 고유의 전통문화와 함께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몇 해 전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경험한 한 지인은 지금의 제주도를 두고 '닳아지면 그대로 버려지는 충전 불가능한 배터리 신세'라고 표현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의 난개발로 제주도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제주도의 전출인구가 전입인구보다 많다는 소식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취지도, 의미도, 효과도 모두 사라졌다고 단언했다. 차라리 제주도 본섬에 딸린 비양도나 우도, 가파도 등에서 한 달을 지내보는 게 나을 거라고 조언했다. 관광객들 등쌀에 머지않아 제주도의 전철을 밟게 될 테니 서둘러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주 신공항 건설 예정지 근처를 지날 즈음 기사와 다시 한번 언쟁이 일었다. 신공항이 열리면 그러잖아도 '그로기 상태'인 제주도에 마지막 카운터 펀치가 될 게 분명하다는 내 말이 화근이었다. 그는 찬반 의견이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지만, 신공항 건설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딱히 근거는 없었다. 그저 "당장 우리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과 "정부가 밀어붙이는 국책 사업은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게 전부였다. 그가 말한 '현실론'은 이른바 '과잉 관광'의 폐해에 시달리는 이웃의 고통에조차 눈 감은, 참으로 비루한 것이었다. 그에게 자연환경은 미래세대로부터 잠시 빌려온 것이란 말은 차마 건네지 못했다.

내일 그는 이른 아침 아이들을 한라산 성판악 휴게소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날씨가 허락된다면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다녀올 예정이다. 한라산을 등반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수다. 정부는 한라산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 등산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한라산 등산객 수는 엄격히 제한하면서,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제주도를 망가뜨리는 외지인 관광객을 통제하지 않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마 한라산 주변만 보호하고 해안가와 중산간 지역은 방치하겠다는 걸까. 한라산이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한라산인데 말이다.

점심 식사를 위해 성읍 민속 마을에 들렀다. 정작 민속 마을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냥 점심만 먹고 나왔다. 수학여행단을 수용할 수 있는 단체 식당이 그곳 근처에 있어서다. 버스가 지나가는 마을 길 어귀에서 차창 밖으로 본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당산나무 아래의 평상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대형 버스들의 행렬을 멍하니 지켜보는 촌로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과 슬픈 표정에서 머지않은 제주도의 잿빛 미래를 보았다. 저 촌로들이 세상을 떠날 즈음 제주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과잉관광#제주도#차고지증명제#제주신공항#관광객수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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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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