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본섬에 딸린 작은 섬 우도도 제주 4.3의 광풍을 피해 가진 못했다. 지금이야 어엿한 우도면이지만, 당시만 해도 북제주군 구좌읍에 속한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본섬을 오가는 교통편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엔 사실상 관심 밖의 고립된 섬이었을 것이다.
서북청년단의 주둔지가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자리한 까닭이었을까. 잔인무도했던 그들의 폭력이 작은 섬 우도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 이후 38도선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로 결성된 단체로, 김일성의 '무상몰수, 무상배분' 원칙의 토지개혁에 저항한 지주 세력 출신의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다.
그들은 1947년 미군정에 의한 3.1절 발포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주도 총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전격 파견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에 불탔던 그들에게 미군정의 정책에 맞선 제주도 주민들은 모두 '빨갱이'로 간주됐다. 그들은 미군정에 의해 중용된 친일 경찰들과 합세하여 제주도 전역을 피로 물들인 장본인이다.
제주도 여행의 대표적인 '핫스폿'이 되어 사시사철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곳이지만, 섬 어디에도 4.3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섬 일주 여행을 위한 버스와 전동차, 자전거는 언제나 만원이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늘 경치 좋은 카페나 사진 잘 나오는 곳에 머문다.
차두옥 선생의 위령탑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는 4.3 당시 총파업과 무장봉기에 연루된 제자들의 도피를 도왔다는 이유로, 서북청년단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끝내 숨졌다. 우도 내 연평 학교의 교사로서,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당국의 끈질긴 감시를 받아왔다.
그는 좌우 이념을 떠나 제자들을 향후 우도 공동체를 이끌어갈 동량으로 여겼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던 야만의 시절, 어떻게든 그들을 살리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거다. 그 덕택에 살아난 이들의 향후 행적은 알 길 없지만, 교육자로서 죽음을 각오한 그의 행동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탄압을 피해 섬을 떠난 제자들은 모두 '빨갱이'로 낙인찍혔고, 그들을 엄호한 그 역시 '빨갱이'라는 누명을 썼다. 서슬 퍼런 연좌제가 적용된 데다 심지어 '대살(代殺)'까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대살'이란 4.3 당시 산에 올라간 이를 대신해 그 가족을 죽이는 행위를 일컫는다.
억울한 죽음이었지만, 유족들은 목 놓아 울 수조차 없었던 한 맺힌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의 이름이 비로소 햇빛을 본 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도 더 지난 2000년에 와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제주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계기가 됐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4.3 추념식에 직접 참석해 국가 권력이 무고한 제주도민을 학살한 책임을 거론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한 이후, 반세기 동안 잊혔던 그의 이름은 우도 공동체를 대표하게 됐다. 2008년 지역 주민의 주도로 위령비가 세워졌고, 그를 추모하는 행사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의 위령비는 '4.3 희생자 차두옥 위령비'라는 이름으로 내비게이션에서도 검색된다. 아래쪽 천진항과 함께 우도의 관문인 하우목동항에서 우도 올레길 코스를 따라 20분쯤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오봉리 사무소 앞 도로변으로, 주변이 온통 너른 밭이어서 쉽게 눈에 띈다.
마을 고샅길을 다니는 버스나 전동차, 자전거를 이용하면 빠르고 편리할 테지만, 추천하고 싶진 않다. 해안선 길이가 17km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섬 우도에선 노약자가 아니라면 두 발이 최고의 여행 수단이다. 자동차를 타면 보이지 않던 게 걸으면 보인다. 우도는 특히 그렇다.
별도의 안내판 대신 위령비와 그의 억울한 죽음과 유가족의 한 맺힌 세월을 토로하는 비문을 나란히 세워놓았다. 우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4.3 유적지여서 느낌이 남다르다. 사진을 찍다 말고 위령비 주변의 웃자란 잡풀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유가족인 줄 착각했을 것도 같다.
갑자기 그가 서북청년단의 손에 고문당했다는 곳이 궁금해졌다.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 당시의 건물이 남아있을 리 없지만, 그 터라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기록에는 연평 지서에서 고문으로 절명했다고 나와 있다. 지서는 지금의 경찰서에 속한 파출소를 이르는 말이다.
당장 우도면사무소를 찾았다. 위령비에서 채 1km 거리도 안 되는 곳이다. 동그란 밤톨 모양의 우도 섬의 정중앙으로 어디서 걸어오든 20~30분이면 충분하다. 학교와 보건소, 우체국, 성당, 수협 등 주요 기관이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한데 뭉쳐 있다.
직원들은 4.3 당시 연평 지서 자리를 알고 싶다는 질문 자체를 낯설어했다. 애초 차두옥이라는 이름조차 어색해하는 듯했다. 단지 연평 지서라고 불린 이유를 설명할 뿐이었다. 섬 전체가 연평리라고 불려 그렇게 명명된 거라고 했다. 내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대꾸한 셈이다.
그러고는 지금의 우도 파출소에 가서 문의해 보라고 했다. 경찰에 관련된 역사이니만큼 그들이 정확하게 알 것 아니냐는 거다. 우도 파출소의 당직 경찰도 면사무소의 직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곳에 있지 않았겠느냐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대신 경찰서 본청이 해당 자료를 가지고 있을 테니 거기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더욱 난감했던 건, 누구든 차두옥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는 건 알지만, 그가 어떤 분이고 왜 희생되었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의 이름으로 애써 위령비를 세운 취지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주민들이 그의 행적도 모른 채 그의 정신을 기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파출소 문을 나서며 괜스레 슬퍼졌다. 지역 주민들이 덩그러니 위령비 하나 세워놓고 할 일 다했다는 식 같아서다. 4.3과 차두옥 선생이 우도를 온전히 대표할 순 없겠지만, 지역 공공기관의 무관심이 못내 아쉽다.
돌아가는 길, 면소재지와 천진항을 잇는 남북 방향 중심 도로변에 조성된 '충혼묘지'에 들렀다. 이 작은 섬에 '충혼'이라는 이름을 단 묘지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다. 큼지막한 충혼탑 뒤로 30여 기의 묘비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6.25 전후 희생된 우도 출신 참전 군인들을 기리는 시설이다.
당장 작은 섬과 대비되는 묘지의 규모에 압도된다. 이렇게 많은 우도 사람이 전쟁에 나선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불현듯 4.3 당시 '폭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제주 청년들의 모습이 포개졌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군 입영을 자원했고, 더 많은 전과를 올려야 했다.
순간, 이곳에 잠든 이들 중에 차두옥 선생이 도피시킨 제자가 있을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일었다. 섬을 떠났다고 해도 당국의 그들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 군 입영은 아니었을까. '4.3 희생자 차두옥 위령비'와 '충혼 묘지'가 공존하는 우도를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