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명인의 삶의 발자취 |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 유지발전을 위해 가치있는 인적자원 발굴 기록 인증 전승 유통을 촉진하고 동기부여해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고,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이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는 18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충청지역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다. 그들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한다. |
전통의 숨결을 돌에 새겨넣다
저는 석공입니다. 땀과 시간을 오롯이 돌 속에 담아내는 석공인의 길은 10대 어린 나이에 시작했습니다. 50년을 훌쩍 뛰어넘도록 지금껏 외로움의 연속이기도 한 것이 바로 석공인의 길입니다. 외길 인생만큼이나 수만 번의 망치질로 전통의 숨결을 고스란히 돌에 새겨넣는 일, 새겨진 만큼의 굳은살은 이제 나이테가 되어있습니다.
투박하고 바위처럼 거친 고흥석(화강암의 한 종류)을 석공이 든 정과 망치를 사용해 깨어내고 다듬기를 숱하게 반복하면 드디어 돌이 형태를 잡아가는 지난한 작업.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더욱 정성 어린 손길로 세심하게 정질하고 다듬어 완성하기까지는 몇 달이 소요됩니다.
돌을 깨면서 긴 시간 삶을 배워왔습니다. 그래도 물끄러미 생명이 깃든 석공예를 한번 바라보고 하늘 한번 바라보며 긴 숨을 내리면 그런 게 또 보람입니다. 지금도 변함없는 믿음은 돌만큼 정직한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 긴 시간은 고뇌를 거쳐 저에게 삶의 성찰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뒤돌아보면 참 아득한 시간이었음을, 그리고 정성스레 다듬어진 작품과 인생의 발자취를 바라보면 여전히 설레는 일임을 저는 압니다.
석공인으로의 입문 계기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로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던 1957년, 저는 그해 8월, 전남 화순군 남면 내리에서 부친 서인석, 모친 정점례 사이에서 9남 1여 중 5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올 정도로 가난한 시골집에서 자라다 보니 배 곪지 않는 날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석공 일을 하시던 맏형님 서형수가 인천선인학교 교문에 세워질 석재조형물 사자상을 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저는 곧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4년, 셋째 형님 서정수를 따라서 대전 서구 정림동 소재 대창석재에 견습공으로 입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수출용 석등, 석탑, 석교, 연지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석공예 기술이 향상되고 수입도 안정되어 갔습니다.
석공예 장인들과의 만남
1976년 후반, 서울 중랑구 망우동 소재 신진석재로 이직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장형이신 서형수, 공장장이신 김진초, 조각가 신극열(작고, 88올림픽공원 석조각 총괄감독), 강종석, 이재순(2016년 7월 국가무형문화재 석조각분야 석장 지정), 이재휘, 조성철 등 여러 석공예 장인들과 석공예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석재 수작업 도구를 만드는 일명 '성령(야끼)'이라는 담금질 방법과 용(여의주), 사자 이빨과 같은 석공예 작품 제작방법도 전수받았습니다.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석등의 중대라는 석물 가공 제작 일을 담당하여 창살이 있는 석등, 석탑을 전문적으로 가공 제작했습니다.
덕분에 고난도의 석공예 가공기술을 습득하고, 능숙하게 석재조형물을 가공 제작하게 된 건 행운이었습니다.
1977년 겨울, 이화여대 조각가 강태성 교수님을 만나 미대 조소과 학생들 졸업 작품을 지도 감수를 몇 년간 했습니다. 아울러 강 교수님의 조형물 제작 작업에도 직접 참여하게 되면서 지금 저의 '돌 세계'를 알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50여 년, 오로지 석수쟁이 외길만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온 석공의 삶을 뒤돌아 회상하여 보면 가슴에는 천사만감(千思萬感)이 교차합니다. 동료 석공예인들과 함께 전국 각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석공예 문화재를 탐방 순회하던 일, 보고 듣고 기록하여 옛 문화재를 그대로 복원 작업하여 재현하던 일, 우리 전통석재, 석공예문화 계승 발전에도 함께 힘을 나누며 교류하던 일 등입니다.
석재사업을 시작하면서 대전 서대전전신전화국(1992년, 6인 공동), 경기도 과천 코오롱사옥(1992년, 5인 공동), 대전 둔산경찰서(1992년, 4인 공동), 대구 시청(1993년, 7인 공동), 대전 중구청(1994년, 2인 공동), 수원 삼성전자(1994년, 4인 공동)등 전국각지를 다니면서 동료 석공인들과 함께 다수의 조형물 공사를 했습니다.
1992년 무렵, 이화여대 강태성 교수님의 조형물 작업 소장 안상학님의 소개로 대전 목원대학교 임선빈 교수님을 만나 대전 유성온천 상징조형물, 세종시 운주산성 복원공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충남대학교 남철 교수, 이영길 교수, 김석우 교수, 목원대 양충모 교수, 이창수 교수, 한남대 박병희 교수, 서울세종대학교 김동우 교수, 울산대학교 유형택 교수, 그밖에 많은 교수님들과의 만남 속에서 석재조형물, 사찰 석탑, 석등, 문화유산 첨성각 등 다양한 석조물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석재조형물의 제작 다듬이질 숙련기술, 석조각문화재 석공예 조각기술, 석재 가공기술, 석재도구 제작기술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만남 속에 세종시 운주산성 복원공사에 참여했고, 사찰 석탑, 석등, 문화유산 첨성각 등 다양한 석조물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평생 돌과 함께 하는 전통 석수쟁이
중국에서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석조제품들과 석재산업 환경문제 등의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석공예 현장 상황도 만만치 않게 힘들고 열악한 작업 환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석공예 일을 배우려고 하지 않아 후배양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석공예 기능인 육성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책과 기능인이 우대를 받는 사회적 환경조성, 석공예기능인들 여건이 개선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안으로는 우리 석공예인들이 서로 협력하고 노력해서 어떻게 하든지 석공예 직종만은 이끌고 나가려고 다방면으로 힘쓰고 있습니다.
꿈이라면 후학들에게 석공예 숙련기술을 전수하여 석공예 기능인들의 숙련기술 향상과 석재국가유산 전통계승에 기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