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한 아동 문학을 소개합니다. 어른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동 문학을 통해 우리 아동 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학 속에 깃든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기자말] |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 그가 그곳을 떠나 자연에서 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노든처럼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뿔을 가진 그의 아내 덕분이었다. 그리고 비록 짧았지만 완벽하게 행복했던, 그의 삶을 빛나게 해주었던 것은 노든의 딸이었다.
그날 밤, 훌륭한 진흙 구덩이를 찾아 달빛을 받으며 온 가족이 목욕을 즐기던 밤, 모든 것이 완벽했던 밤, 노든 가족에게 다가온 어둠의 그림자는 바로 인간이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노든은 모든 것을 잃었다.
비열한 인간은 노든을 유인해 내고, 아내와 딸의 온몸에 총알을 퍼부었다. 그리고 노든의 아내는 뿔이 깊게 잘려 나간 채 마지막 숨을 쉬었다. 노든에게 밤보다 길고 긴 암흑, '긴긴밤'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와 딸 옆에서 죽어가던 노든을 발견하고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역시 인간이었다. 노든은 그렇게 다시 눈을 떴고, '파라다이스 동물원의 새 식구, 노든을 소개합니다!'라는 푯말과 함께 '노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노든의 이야기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북부흰코뿔소' 수컷이었던 '수단'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수단은 밀렵으로 사실상 멸종되어 버린 코뿔소 종이다. 수단이 세상을 떠나기 약 15개월 전인 2016년 12월 5일 AFT 소속 기자 토니 카품바는 케냐 산기슭에 자리한 '올 페제타 보호구역'에서 수단을 촬영한다.
그의 사진 속에는 자신의 종을 말살한 인간으로부터 생의 끝자락까지 정성 가득한 보살핌을 받는 코뿔소의 모습이 담담히 그려져 있다. 사진 속 수단의 머리엔 잘린 뿔 2개가 달려 있다. 날카로워야 할 코뿔소의 뿔이 뭉툭하게 잘려진 모습은 이 거대한 동물의 삶에 무단 개입한 인간들의 폭압을 상징한다. 잘려 죽음을 맞게 되거나 살아남게 하려고 잘라버리거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노든의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무심한 인간들의 자연 파괴와 같은 계몽적 이야기도 아니다. 삶의 관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살아가게 되느냐, 어떻게 살아남게 되느냐.
노든은 동물원에서 다정한 친구 앙가부를 만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동물원 밖을 나가본 적 없었던 앙가부는 동물원 밖에서 삶을 경험한 노든을 존중하면서도 동물원 규칙을 세심하게 알려 준 좋은 친구다. 날마다 인간을 향한 복수를 꿈꾸는 노든을 도닥이고, 노든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날, 앙가부는 동물원을 덮친 '뿔 사냥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뿔이 잘려진다. 동물원은 다리 치료를 위해 치료실에 있어 살아남은 노든의 목숨을 위해, 뿔을 잘라버리기로 한다. 노든의 목전에서 이렇게 다시 삶과 죽음이 대치되고 이어진다.
코뿔소의 뿔은 중국과 베트남 등의 전통 의학에서 인기 있는 약제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끊임없이 코뿔소 뿔은 비싼 값에 거래되기에 밀렵이 성행 중이다.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생명을 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지 부풀어 오른 욕심 때문에 무분별하게 생명을 남획하기도 한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어떤 생명도 하지 않는 일이다.
이 무렵 파라다이스 동물원엔 또다른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다.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일에 진심인 펭귄 무리들 사이에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인, 버려진 알이 생긴다. 펭귄들이 알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알은 죽음에 이를 것이 자명했다.
그 순간 '치쿠'와 '윔보'가 나선다. 이 두 젊은 아빠는 지극정성으로 알을 돌보고 가족이 되어 간다. 살아남은 노든, 살아남은 버려진 알, 이 둘의 기막힌 인연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연결된다.
긴긴밤을 걷다
어느날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매캐한 연기와 함께 굉음이 퍼진다.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솟고 노든을 가로막고 있던 철조망이 부서진다. 노든은 혼자 우리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살아남은 또다른 생명, 치쿠와 만난다. 치쿠는 윔보를 잃었지만, 기어이 버려진 알을 양동이에 넣고 부리에 문 채 동물원 밖으로 나와 노든과 동행한다.
세상 밖으로 나온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잠들지 못하는 날에는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그들에게 긴긴밤이 계속된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노든과 치쿠는 걷는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걷고, 잠자리를 찾기 위해 걷고, 무엇보다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어야 했다.
그러니까 둘은 살기 위해 긴긴밤을 걸어야 했다. 우리 역시 이렇게 걸어야 하지 않는가! 노든과 치쿠와 같이! 그들의 긴긴밤은 우리의 긴긴밤이기도 하다. 치쿠는 노든에게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는 최고의 길동무였다. 치쿠는 윔보와 지냈던 얘기들, 동물원에서 지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쉬지 않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치쿠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노든은 알에 대해 딱히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기분 좋았다."(63쪽)
노든과 치쿠가 그렇게 우리가 되어 가던 어느 날, 알에서 태어난 아기 펭귄에게 바다를 선물하고 싶었던 치쿠는 기진맥진한 채 세상을 떠난다. 노든에게 약속을 맞긴 채. 다시 혼자가 되어 긴긴밤을 견뎌내야 할 노든은 '그 애'를 바다에 데려다주어야 했다. 항상 남겨지는 쪽이었던 노든은 태어난 새끼에게 말한다.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그러나 정작 노든은 아이를 바다로 보내고 나면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러 가겠다고 한다. 복수를 하러 가면 노든은 죽을 거라는 아이의 말에도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다고 한다.
끝나지 않는 그의 긴긴밤 속에 '아이'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인간에게 달려갔을지도 모르겠다. 노든과 같이 긴긴밤을 견디는 이들에게 인연은 삶의 이유가 된다. 노든에게 앙가부가 그랬던 것처럼, 치쿠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름 없는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파란 지평선
노든과 아이가 바다를 향해 삶의 모든 힘을 쏟아놓을 때 다시 '그놈들의 냄새'가 난다. 총알이 빗발치는 순간에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달려가 입에 물고 도망쳐야 했던 노든은 점점 기력을 잃어간다.
앙가부가 말했던 '좋은 인간'들이 노든을 발견했을 때 기운을 잃은 노든은 홀로 아이를 보낸다. 아이의 가족이 될 펭귄들을 찾아 바다를 향해 달리게 한다. 아이는 기어이 그 긴긴밤의 여정을 이기고 바다에 도착한다.
노든은 그 옛날 코끼리 고아원의 코끼리들이 노든을 격려했던 것처럼 아이를 도닥이며 자신의 삶을 살게 했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그래."(16쪽)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115쪽)
긴긴밤을 지나 비로소 파란 지평선을 향해 달려, 푸른 바다에 이르게 하는 이 격려는 우리를 향한 격려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해 우리가 해야할 격려이기도 하다.
마지막 흰바위 코뿔소 노든의 삶은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서 촘촘하게 얽힌 삶의 연대가 우리를 살게 만들며, 깊고 긴긴밤이 우리를 용기 있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교훈 하지 않으면서 그저 아픈 운명을 담담히 보여주며 주먹을 쥐고 단단히 일어서게 하는 노든의 삶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힘차게 격려하는지!
더불어 루리 작가가 작품 속에 펼쳐놓은 드넓은 초원과 그 길을 함께 걷는 코뿔소와 펭귄의 모습은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단단한 바위산을 넘어 지평선을 향해,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싶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