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5일은 미국의 선거일이다. 대통령 선거뿐 아니라 상·하원 선거와 일부 주에서는 주지사 선거도 함께 치른다. 대선이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정치권에서는 상·하원 선거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양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도, 상원과 하원의 의석수도 팽팽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뉴욕주는 대통령과 상·하원 의원 등을 뽑는다. 선거 당일의 복잡함도 피해야겠고, 다음 주에 배심원 일정도 있어 여유를 가지고자 조기 투표를 하기로 했다. 사전 투표 기간은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이고, 카운티홀(군청)을 비롯해 가까운 투표소 몇 군데를 미리 알아보았다. 유권자 정보 센터에서 발급한 양당 의원 후보에 대한 간소한 비교 정보도 우편으로 받았다.
이전에도 우편 투표와 조기 투표로 본선거 일의 긴 줄서기를 피할 수 있었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온라인 게시판에는 '짧은 줄'을 찾는 글이 올라왔다. 예년과 달리 조기 투표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지금 도서관인데, 투표하려면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답니다. 좀 더 짧은 줄을 가진 투표 장소 아시는 분?'과 같은 질문이 매일 올라왔고 댓글로 정보가 오갔다.
두 시간 동안 줄을 서 있다가는 자칫 하루 일정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아이들을 등교시키자마자 그나마 한적할 듯한 투표소로 '오픈런'을 했다. 9시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100여 명 가까운 유권자가 줄을 서 있었다. 보행 보조기구를 짚은 노인부터 유모차를 밀고 온 아기 엄마까지 차분하게 투표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부부는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고개를 흔들더니 돌아나가기도 했다. 순식간에 내 뒤로도 50여 명이 줄을 섰다. 아시안은 나 하나뿐이었다.
우리 동네는 맨해튼에서 꽤 떨어진 근외 지역이다. 맨해튼을 중심으로 뉴욕시 지구는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이지만 대도시권을 벗어날수록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지지율이 비슷해지고, 공화당 지지율이 강한 근외 지역도 다수 있다.
한국은 선거기간에 홍보용 현수막이 주로 걸리지만, 미국 주택가에는 선거원들이 표지판을 꽂아두기도 하고,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의 홍보용 스탠드(야드 사인)를 마당에 세운 집들을 흔하게 본다.
우리 집에서 투표장으로 가는 멀지 않은 길에 보이는 야드 사인을 세어보았다. 트럼프와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야드사인이 27개인데 반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스탠드는 하나뿐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의 이름 사인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적극적인 공화당 지지자가 많다는 뜻일 테다. 투표장에 줄을 선 100여 명의 유권자 가운데 아시안이 나 하나뿐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투표소로 마련된 공간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입구에 나이가 지긋한 봉사자 낸시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잠시 대기 중인 우리 몇 사람에게 본인은 아침 6시부터 준비 상태였다면서 '이 나이에 쉽지 않다, 이제 당신들(젊은 사람들)이 봉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러고 보니 유권자를 확인하는 두 분도, 투표지를 뽑아 주는 분도, 스티커를 나눠 주는 분도 나이가 지긋해 보인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미계로 보이는 유권자가 뒤따라 나왔다. 그에게 '나는 (대통령에 대한) 결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을 건넸더니 '이해한다. (이민 문제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먹고 살려고 여기 미국에 왔는데, 나는 그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가족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날 만난 우크라이나계 유권자는 '정의와 여성 인권을 위해' 투표할 거라고 했고, 또 다른 유권자는 '트럼프도 바이든도 다 겪어봤으니 새로운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새로운 후보가 해리스를 뜻하는지, 소수당의 후보를 말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번 대선과 총선이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치러지는지 보여 주는 듯하다.
다행히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투표를 마칠 수 있었다. 오후에 접어들자 내가 갔던 투표소도 줄이 길어져 투표에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한다. 높은 사전 투표율을 체감하고 나니 결과가 더 궁금해진다. 민주당 측은 압승을 해야 지난 대선과 같은 후폭풍이 일지 않을 거라 했었고, 공화당 측은 압승으로 바이든 정권의 무능함을 증명할 거라 했었다. 그런데 여론 조사상으로는 양측 모두 원하던 압승은 거두지 못할 것 같다. 부디 선거 후의 풍경도 사전 투표소에서의 질서와 차분함을 이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