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전기차 화재의 원인과 대책을 묻는 질문이 계속됐다. "유감스럽다"는 말의 반복이었다. 예상된 답변이었다. 한국 소비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과 표현은 없었다.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오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운터튀르크하임의 메르세데스-벤츠 본사 회의실. 벤츠의 배터리 개발을 총괄하는 회사 최고위급 임원이 나섰다. 지난 8월 인천 청라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일어난 벤츠의 전기차 이큐이(EQE) 화재 사고 후, 독일 본사 책임자가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기자들의 관심은 높았다.
이날 1시간 30분에 걸친 인터뷰도 전기차 화재에 집중됐다. 본사 차원에서 이번 사고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향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 이었다. 이미 국내에선 벤츠 차주들이 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였다. 벤츠도 적극적이었다. 한국 기자들을 상대로 배터리 연구개발 과정을 비롯해, 자체 배터리 생산 공장도 공개했다. 전기차 이큐에스(EQS) 실제 충돌 실험도 기자들 앞에서 직접 시연해 보였다.
회사로선 전기차 배터리 안전을 둘러싼 관련 시설을 거의 공개한 셈이다. 물론 한국 기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벤츠 본사 배터리 연구개발 총괄책임자까지 직접 간담회 자리에 나섰다. 분명 이례적이었다. 본사 쪽 관계자는 기자에게 "특정 국가의 미디어를 상대로 이처럼 광범위하게 연구와 생산 현장을 공개한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 시장에 대한 중요성과 함께, 전기차 안전을 둘러싼 논란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
국감장을 방불케 한 간담회, 벤츠 배터리 개발 최고책임자의 항변
그럼에도 벤츠의 태도는 분명했다. 기자들의 끈질긴 질의에도, "벤츠가 설계하고 만드는 배터리의 품질은 문제 없으며,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이날 간담회에 나선 우베 켈러(Uwe Keller) 벤츠 배터리 개발 총괄은 무엇보다 배터리의 품질 관리와 엄격한 테스트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한국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고에 대해 "피해를 본 분들께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벤츠에서 배터리의 결함을 알고도 은폐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현재 경찰 등에서 조사가 진행중이고, 공식적인 보고 내용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외부 충격으로 인한 배터리 셀 손상에 따른 화재 가능성'이라는 감정 결과에 대해서도, 우베 켈러 총괄은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는 것에 양해 부탁드린다"고 했다. 대신 벤츠 내부적으로 모든 차량에 대해 충돌 테스트를 하고 있고, 배터리가 견딜 수 있는 외부의 힘을 확인하기 위한 자체 충돌 실험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회사 쪽은 기자들에게 실제 국내서 판매 중인 전기차 EQS의 충돌 실험을 전격 공개했다.
이어 벤츠 전기차에 들어간 중국산 파라시스 배터리의 안전성과 설계 오류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터리 셀의 경우 표준 설계 방식에 따라서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친다"라면서 "배터리 설계 자체의 문제라 생각하지 않으며, (파라시스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에 따른) 열폭주 가능성과 방지 대책도 다른 배터리 시스템과 동일한 기준에 따르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 자리는 마치 국회 국정감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기자들의 질의가 계속됐다. 배터리의 안전성을 좀 더 높일 방안, 화재 위험을 줄일 획기적인 대안은 무엇인지, 한국에 들여오는 벤츠 전기차에 중국산 파라시스와 씨에이티엘(CATL) 배터리가 계속 탑재될 것인지 등…
"유감" "양해"…전기차 화재 논란 파라시스 배터리, 당분간 계속 사용
답변에 나선 카르스텐 브레크너 파워트레인 구매 및 공급사 품질 총괄은 "현재 생산 중인 전기차의 경우 동일한 플랫폼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배터리 셀 공급업체로 CATL, 파라시스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당분간 이같은 기조는 유지될 것"이라고 답했다. 대신 차세대 전기차 개발을 위한 새로운 플랫폼도 추진 중이며, 이에 맞춰 배터리 셀 등의 공급 업체가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우베 켈러 총괄은 "이번 사고와 무관하게 벤츠는 기술과 안전성을 개선해 나갈 것"이라며 "궁극적인 목표는 (화재 위험성이 적은) 전고체 배터리로 가는 것이지만 중간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시스템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벤츠는 전기차의 핵심 요소인 배터리의 원료부터 셀과 모듈화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생태계를 구성하려고 한다. 배터리 연구개발센터를 통해 자체 배터리 기술을 축적하고, 셀 제조사를 통해 자신들만의 배터리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물론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상용화하는 수준까지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배터리 기술은 국내 엘지(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해 삼성에스디아이(SDI), 에스케이온(SK On)이 크게 앞서 있는 상태다. 벤츠가 오는 2028년부터 10년 동안 북미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 배터리에 LG에너지솔루션 제품을 사용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계획대로라면 2038년까지 미국에서 팔리는 벤츠 전기차에는 한국산 배터리가 들어간다. 그럼에도 벤츠의 배터리 기술과 생산의 내재화를 위한 투자는 계속되고 있었다. 벤츠가 기자들에게 직접 공개한 배터리 연구개발센터, 생산공장은 그들이 왜 배터리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배터리 연구개발, 생산시설에 충돌 현장도 공개
지난 22일 기자가 찾은 독일 헤델핑겐의 배터리 생산공장. 이 곳은 원래 내연기관 자동차의 변속기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전동화 시대에 맞춰 직원 재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라인 재배치 등이 이뤄졌다. 배터리 재활용 공장과 마찬가지다. 현지에서 만난 회사 관계자는 "전기와 배터리를 다루는 새 공정에 들어오려면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3년의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공장 내부에선 직원들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공정 대부분이 로봇과 전동화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전체 면적만 1만 6500㎡로 배터리 생산과 물류를 담당하는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첨단 시스템을 기반으로 대부분 자동화돼 있지만 수작업이 필요한 구간도 있다. 대체로 최종 품질 검증 단계에선 숙련된 직원들이 직접 확인한다.
약 300미터 길이 라인의 70개 이상 전동화 스테이션에서 전기차 리튬 이온 배터리 팩을 만들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벤츠 전기차의 EQS와 EQE 모델에 들어가는 배터리 팩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모델들이다. 지난 8월 화재가 났던 EQE 모델의 배터리도 이곳에서 생산됐다.
기자가 한국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공장에서의 대응을 묻자, "한국 화재 사고 이후 해당 차종에 들어간 배터리 생산 이력과 공정 등의 자료를 본사로 넘겼다"고 회사 쪽 관계자가 답했다. 그는 이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배터리 팩에 대한 모든 정보는 30년 동안 보관한다"고도 했다. 대신 해당 정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을 꺼렸다.
이곳 공장은 벤츠와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은 업체로부터 셀 등을 제공받는다. 이후 안전도 등의 검사를 거쳐 최종 배터리 팩으로 제작, 생산된다. 'CATL이나 파라시스에서 배터리 셀이 들어오느냐'고 묻자, 회사 관계자는 웃으면서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이곳은 벤츠의 배터리 내재화에 핵심이다. 앞서 우베 켈러 총괄이 밝힌 대로 궁극적으로 벤츠 기술에 맞춘, 벤츠의 DNA가 담긴 배터리를 생산하기 위한 최전선이다. 아직은 배터리 셀을 공급받아 팩을 생산하는 곳이지만, 궁극적으로 자체 개발한 배터리 셀이 들어간 배터리 제품을 최종 생산하는 기지가 된다.
또 이 공장은 배터리 연구개발을 위한 E캠퍼스와 함께 최근 문을 연 배터리 재활용 공장을 연결하는 곳이기도 하다. 배터리 연구개발과 생산, 재활용에 이르기까지 전기차 배터리 벨류체인(내재화)을 완성하는 것이다. 글로벌 자동차 회사 가운데 벤츠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