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을 하다, 17살인 1965년 가을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한다. 근로기준법도 지켜지지 않는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현실 속에서 1969년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1970년에는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청계천 일대 의류산업 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제출한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평화시장 집회가 경찰에 가로막히자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며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면서 분신했다1).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전쟁과 군사 쿠데타 이후 억눌려 있던 한국 사회를 흔들었고, 1970년대 노동운동, 학생운동이 다시 시작되는 데 말 그대로 밑불이 되었다. 이 때문에 매년 11월 전태일 정신 계승 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전태일 정신은 평등과 연대, 변혁의 정신이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는 전태일 사상을 "각성된 밑바닥 인간으로서 지금껏 현실이 자신에게 강요해 왔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사회의 거꾸로 된 가치관을 완전히 다시 거꾸로 세우며, 이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며, "우리 모두를 행동으로 불러내는 연대행동의 사상"이라고 말했다2).
전태일정신은 노동자 몸과 건강의 사상
2024년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서 다시 거꾸로 세워야 할 가치관은 무엇일까. 전태일 정신은 노동자 몸과 건강에 근거한 사상이기도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조직한 삼동회와 함께 1970년 평화시장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한다. 라디오 방송에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려 했지만, '좀 더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오라'며 거절당한 이후 발로 뛰어 126명에게 설문을 받았다.
그 결과에 따르면, 95%인 120명이 하루 14~16시간 노동하고, 96명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렸으며, 102명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전원이 눈병 증상을 갖고 있었다. '못 배운 사람은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거'라고,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노동자는 으레 그렇게 사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실태조사 결과는 되묻는다. 그게 정말 맞냐고.
노동자들의 이런 처참한 환경이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보지도 듣지도 않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나라'가 먼저 잘살게 되면 다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실태조사 결과는 10월 7일 <경향신문>에 크게 실렸고,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을 면담하기까지 했지만,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달라지는 건 없었다. 노동청 앞에서 시위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태일이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한 배경이다.
우리는 듣고, 보고 응답하고 있는가
50년이 지난 2024년 한국 사회는 이런 목소리를 보고 듣고 응답하고 있는가. 2024년 9월 민주노총은 선박건조, 수리업에 대한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2024년 들어 공익감사 청구 시기까지 조선업 사업장에서 끼임, 폭발, 추락으로 1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조선소에서 노동자가 일하다 사망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산업재해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망 사고가 가장 많은 업종 중 하나다.
이미 6년 전인 2018년,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가 꾸려져 방대한 조사를 통해 사고조사보고서를 낸 바 있다. 그 보고서는 조선업에서 안전을 위배하는 무리한 공정 진행이 자주 발생하고, 이를 위해 재하도급이 빈번하게 확대되면서 하청 노동자가 과도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안전에 대한 책임이 불분명해지는 것이 조선업 중대재해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중대재해 방지와 안전 확보를 위해 다단계재하도급의 원칙적 금지와 필요한 경우에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도록 하고, 무리한 공정 진행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나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노동부와 조선사들이 '위험표지판 부착 캠페인', '10대 안전수칙 캠페인'을 하지만, 조사위원회가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 제시한 다단계 재하도급 금지와 제한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안전과 비용, 생명과 생산 효율을 견주어보고 비용과 생산 효율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4년 전태일 정신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이 낡은 비교와 기준을 바꾸는 것일 테다.
일터의 화재 참사, 무엇을 남길까
1911년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공장 화재 사고가 있었다. 뉴욕에 있는 10층짜리 건물의 8~10층을 사용하던 공장이었다. 노동자들 대부분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된 가난한 여성 이주노동자들이었고, 사업주는 노동자들이 옷가지를 훔쳐 간다는 이유로 출입문을 잠가두었다. 화재가 일어나자 공장주는 열쇠를 들고 먼저 탈출해 버렸다. 화재경보벨이 울리지 않아 화재 발생을 뒤늦게 알았던 노동자들은 비상계단으로 대피하다 부실한 계단이 무너져내리면서 추락사하기도 했다. 이 참사에서 14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80년 뒤인 1991년 노스캐롤라이나주 햄릿에 있는 임페리얼푸드 닭고기 공장에서도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노동 관련 규제를 회피하고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사용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의 흑인 거주 지역에 세워진 공장 기계의 유압액이 누출되어 튀김 기계에 불이 붙었을 때, 공장은 환기가 거의 되지 않는 상태였고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화재비상구는 잠겨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닭을 훔쳐가는 일이 잦다는 이유였다. 이 화재로 사망한 25명의 노동자는 대부분 흑인 여성이었다.
꼭 닮은 이 두 사고 중 그나마 트라이앵글 화재는 전국적으로 변화를 끌어내기라도 했다. 노동자배상법이 만들어지고 화재 비상구와 화재 경고 벨,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 문을 잠그지 못하게 하는 규제가 생겼다. 그러나 햄릿 화재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3)
아리셀 참사 이후 우리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고용에 따라오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제조업에 불법인 파견노동자를 사용한 데 대한 처벌을 요구할 뿐 아니라, 법적 고용 관계에 근거하지 않고도 노동을 통해 이윤을 챙기는 '자본'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리셀은 사고가 발생한 6월 한 달 동안 60명의 인력을 일시적으로 투입하여 100명이 넘는 노동자로 생산 시설을 가동했으면서도, 상시고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5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여러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작은 사업장 안전에 법적 사각지대를 허용하는 법체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
가스 검지 및 경보 장치가 없었고 화재 위험 물질에 대한 교육도 없었던 점에 대해, 화재 관련 근로감독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을 넘어서, 안전한 노동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일터의 안전과 관련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할 때, 고용이나 임금을 걱정하지 않고 노동자가 작업을 중단하고 조치를 요구할 수 있도록 노동자의 힘을 키워나갈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 정신의 2024년 과제다.
노동운동의 과제, 우리의 과제
2013년 현대제철에서 아르곤 가스 질식으로 5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사망한 사고가 속보로 뜨는 것을 보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의 안전 전문가가 '이런 큰 사고가 일어났는데 왜 파업하지 않는가?' 질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1년에 천여 명이 일하다 사고로 사망하는 대한민국에서 전국적 총파업은커녕 해당 업종이나 사업장에서도 사고를 이유로 한 '파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새삼 당황스러웠다. 현실 가능성을 떠나 노동안전보건활동가라는 나 자신도 일터의 사고 사망이 파업을 통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투쟁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노동자 몸과 마음을 기준으로 하는 세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우리 노동자들 역시 익숙한 사고와 투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2급 발암물질인 걸 알면서도 임금 때문에 야간노동을 '선택'하거나, 나보다 더 경제적으로 취약한 노동자가 야간 노동을 '선택'하는 것을 두고 보는 대신 우리에게 임금은 무엇이어야 하고,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지 제기하고 싸우며 임금 때문에 불필요한 야간노동을 용인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노동자의 건강이 기반하는 몸과 마음은 섹슈얼리티를 체현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남성의 과로사와 여성의 초단시간 노동, 일터에서의 딥페이크 성폭력 등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떻게 젠더와 관계 맺는지, 성별 분리는 일과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성차별은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드러내고 맞설 때 노동자 건강을 위한 전환이 시작될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넘어 영적 건강을 얘기하는 시대다. 일터에서의 영적 건강이란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새길 수 있고, 일을 통해 사회와 연결되는 감각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체념 대신, 제국주의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 생산을 거부하거나, 기후위기 부채질하는 생산을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노동을 조직하고자 하는 싸움은 노동자의 '영적 건강'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노동자 몸과 마음에 기반한 사회로의 전환, 2024년 전태일 정신의 최전선이다.
1) 조영래, 전태일평전, 전태일 소개
2) 같은 책
3) 제시 싱어, <사고는 없다>, 2024, 위즈덤하우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1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최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