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입장료만 200만 원짜리인 컨퍼런스가 있었다. 포토샵 회사 어도비였다. 거기서 발표한 생성형 AI의 이미지와 영상 작업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상식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그림에 관심이 많은 내 아이에게는 반갑기도, 허무하기도 한 소식이었다.
"그림도, 수학도, 영어도 다 AI가 훨씬 더 잘하잖아. 나는 공부는 싫고 그림은 좋은데 이제 좋아하는 것도 못하게 생겼어."
중학생 아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나도 말문이 막힌다. AI에 최적화된 GPU 칩을 만드는 엔비디아 시가총액이 얼마 전에 애플을 넘어섰다고 한다. 적어도 AI가 퇴화할 일은 없겠다.
AI 세상과 학교 진학은 다른 세상인가
그러니 몇 년도에 어디서 뭘 했는지 외우는, 혹은 두 개 물통의 부피 차이를 묻는 시험은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든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네 말이 맞으니 다 때려치우자, 라고 말할 과감함도 엄마인 내겐 없다. 그저 건조하게 현실을 말할 뿐이다.
"공부를 심하게 못하면, 우리나라 특성상 그건 자존감 문제가 돼. 너무 못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배짱도 훌륭하긴 하지."
우리 동네는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다. 집에서 5분 거리 학교를 두고도, 공부를 '너무' 못하면 1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를 가야 한다. 그걸 알아서일까. 아이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
며칠 전 고교학점제 설명회를 갔다. 절대평가가 된 영어는 중학교 때 끝내야 하고 그러려면 이정도 수준 문제집은 풀 수 있어야 한단다. 인공지능이고 뭐고 지금 급한 건 진학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아이에게 영어 독해집을 종류별로 슬쩍 내밀어봤지만 통한 게 없다. 독해집에는 먼지가, 내 마음엔 걱정이 쌓였다. 그러다 AI가 생각났다.
사람이 AI보다 잘하는 것
아이가 좋아하는 웹툰을 온라인에서 찾았다. 챗GPT에게 이걸 중학생 수준의 영어로 써 달라고 했다. 1분 만에 본문이 나왔다. 관련된 객관식 문제 3개를 주문해서 아이에게 내밀었다.
투덜거리며 프린트를 받아든 아이의 세모눈이 점점 웃음기 어린 초승달로 변했다. 아이가 싱글벙글하며 영어 독해 문제를 푸는 모습은 처음 봤다. 물론 내가 옆에서 흥을 돋운 공도 있다.
나중에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면 이런 맞춤형 얼쑤절쑤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닌 거 같다. 10대 아이들 교육을 AI에게 전담할 수 없는 큰 이유다.
내친김에 디스코드를 아이에게 보여줬다. 영어 프롬프트로 이미지를 생성해주는 AI프로그램이다. '똥머리를 한 여자 중학생'을 그려보자고 했다. 물론 영어는 파파고 몫이다(참고로 '프롬프트'란, AI 모델에서 출력을 생성하기 위해 입력하는 텍스트를 말한다. 프롬프트는 AI 모델이 학습한 내용 가운데 특정 내용을 탐색하도록 안내해 목표에 맞는 결과를 생성한다. 추가로 '디스코드'란 주로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이 많이 이용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이다. 메뉴 중에서 이미지를 생성하는 명령어가 있다).
그런데 파파고가 똥머리(bun hair)를 burn hair로 쓰는 바람에 엉뚱한 그림이 나왔다. 생각 못한 결과물에 우리 둘 다 빵 터져버렸다. 그 덕에 프롬프트 중요성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파파고의 오류가 고마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AI와 합작한 그림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더불어 내가 만든 독해 프린트 덕에 영어 성적도 1등급을 찍고 가까운 고등학교로 배정 받았다, 라고 하면 정말 아름다운 결론이겠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 엔딩이다. 이런 이상적인 풍경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랬어도 아이와 직접 경험을 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막연한 두려움보다 부딪혀본 시행착오가 나을 테니 말이다. 아이는 다시 그림을 즐겁게 그린다. 학과 공부 필요 없다는 소리도 더는 없다. 어미로서는 그걸로 족하다.
청소년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때 이런 기억들이 작은 탈출구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다음회차 탈출구를 위해 나도 프롬프트를 더 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