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발달장애인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가게들의 정보를 한 곳에 모아놓은 지도가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 편한, 일명 '맘 편한 가게 지도'입니다.
아들(자폐성 장애)의 엄마인 전, 이 작은 지도 한 장에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사실 아들과 함께하는 삶에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수시로 발생하거든요. 어쩔 땐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카페나 식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온 가족이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를 마시며 쉴 때도 있어요.
그런데 동네 산책도 아니고 무려 제주도 여행을 하는데 발달장애인이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가게들이 있다니… 얼마나 든든한 마음일지 제 심정이 이해 가시죠?
지난 10월 5일 제주도에 볼 일이 있어 혼자서 1박2일 여행 겸 출장을 다녀왔어요. 일이 있어 간 김에 '맘 편한 가게'들을 몇 군데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담아두고 싶었어요. 저는 서울에도 '맘 편한 가게 지도'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1인이거든요.
'5분컷' 미용실의 정체
주원이(자폐성 장애) 엄마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동네에 하나씩 있을 법한 작은 미용실이었어요.
발달장애인의 부모들만 아는 고충이 있는데요. 자녀들을 데리고 미용실에 가는 게 지금 수능 쳐서 이 나이에 다시 대학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랍니다. 감각 자극이 예민한 발달장애인에게 미용실은 공포와 불안감이 뒤섞인 공간이에요.
게다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요. 저는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이 머리를 자를 때면 지금도 아들 앞에 버티고 서서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얼굴 양쪽을 가만히 잡고 있답니다.
그래서 반가웠답니다. 미용실이라니. 김희선 헤어뱅크. 이름마저도 익숙한 그곳에서 주원이는 머리를 깎고 있었어요. 주원이 엄마는 그곳의 오랜 단골인데요. 만나자마자 원장님 손이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며 칭찬부터 쏟아냈습니다.
발달장애인 커트에서 필요한 건 뭐? 바로 속도입니다. 언제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빠른 손길로 후다닥 멋지게 자르는 게 가장 필요한 기술이에요.
알고 보니 원장님은 십수 년 전부터 발달장애인의 커트를 수 천 회 이상 담당한 '대가'이더라고요. 미용실 바로 앞에 통합어린이집이 있는데 그곳의 모든 학생이 원장님 손길을 거쳐 갔답니다.
"미용실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당연히 불안을 느껴요. 그럴 때면 내 무릎에 앉혀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내 다리 위에 엎드리게 해서 자르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들이 불안감을 덜 느끼면서도 머리를 자를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수많은 발달장애인의 머리를 담당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대요. 조금 힘들겠다 싶은 아이 머리는 밑에서부터 자르기 시작하고, 괜찮겠다 싶은 아이는 윗머리부터 자르는 거죠. 중간에 도망칠 경우 머리 밑단이라도 정리가 되어 있으면 깔끔해 보이기 때문이래요.
"저는 발달장애인을 양육하는 부모들을 보면 오히려 다른 손님들보다 더 긍정적이고 밝다는 걸 느껴요. 아마 자녀를 키우는 그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아 나가다 보니 더 긍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곤 해요."
익숙한 음식을 더 맛있게
제주도에 여행 갈 때마다 우리 가족은 먹고 싶은 게 많아요. 서울에선 먹기 힘든 온갖 현지 음식으로 삼시세끼를 때우고 싶지만 예민한 미각으로 못 먹는 것 많은 아들로 인해(심지어 면 요리도 못 먹어요) 대다수 경우엔 서울에서도 먹던 익숙한 것을 또 먹곤 합니다.
서울에서도 먹는 갈치조림, 서울에서도 먹는 해물탕. 그런데 제주도 물가가 가볍진 않잖아요. 한 끼 먹을 때마다 얇아지는 지갑에 부모 심장만 벌렁벌렁합니다.그런데 앞으로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될 듯 합니다.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반찬 하나하나가 다 맛있는데, 가격도 착한(1인당 9000원이요) 한식 뷔페 가게가 '맘 편한 가게'로 등록돼 있었거든요.
'맛찬들 한식'은 부부가 운영하는 백반집인데요. 사장님 자녀가 발달장애인 (지금 성인)이에요. 그래서 발달장애인에게 우호적인 '맘 편한 가게'에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앞장서 등록하셨다고 합니다.
이곳은 매일 13가지 반찬이 새롭게 만들어지는데요. 아침마다 도시락 포장 배달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메뉴를 고수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제가 놀란 건 서울에선 메인 메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어요. 감자탕, 돼지갈비, 빙어튀김이 한 끼에 나오더라고요.
게다가 사장님 손맛이 얼마나 좋은지 어묵볶음, 멸치조림 하나로만 밥을 먹어도 될 정도로 반찬들이 맛있어요.
"발달장애인이요? 오히려 저는 다른 손님들보다 더 친근하죠. 얼마든지 편하게 와서 드세요. 더 많이 먹고 가세요. 돈은 아침에 하는 도시락 배달로 벌면 돼요. 낮에 여는 식당은 모두의 맛있는 한 끼를 위한 것이니 편하게 오세요."
바다 코앞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밥을 먹었으면 커피도 마셔야죠. 카페 중에서 '맘 편한 가게'를 골라봅니다. 카페 통창 바로 앞에 바다가 넘실대는 곳이 있대요. 카페 이름이 무려 '시인의 집'입니다. 사장님이 시인이래요.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통창 바로 앞이 바다입니다.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가장 제주도다운 전망을 즐기며 쉼을 누려봅니다.
사장님은 '맘 편한 가게' 등록 이유에 대해 "누구에게든 다른 기준이나 편견을 갖고 있진 않아요. 이곳은 누구나 다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죠"라고 말했습니다. 맞아요. 누구나 들를 수 있는 곳인데, 장애를 이유로 거부당해선 안 되는 거죠.
다만 이곳에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습니다. 북카페거든요. 손님들은 이곳에 조용한 여유를 즐기러 옵니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과 가족들도 그에 맞는 예의를 배우는 건 필요할 듯 해요. 핸드폰은 무음으로. 대화는 가급적 작은 소리로.
'시인의 집'에서 음료 한 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차츰차츰 그런 실전 경험이 쌓이다 보면 발달장애가 있는 당사자도 장소에 걸맞은 사회적 규범을 익혀갈 수 있을 거예요.
맨발 산책 가능한 테마공원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테마공원인 돌하르방 미술관이에요. 그동안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유명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녔었는데요. 이런 곳이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앞으로는 매번 이곳에 들를 듯합니다.
아들이 자유롭게 뛰고 걷고 보고 만지고 뒹굴고 놀기에 참 좋은 환경이 구축된 것을 보고 어떻게 이곳이 '맘 편한 가게'에 등록하게 됐는지 궁금했는데요. 알고 보니 관장님 자녀도 발달장애가 있더라고요. 역시 우리들(발달장애인의 부모) 마음은 우리들이 가장 잘 아는구나 싶었어요.
공원 전체에 250여 개에 이르는 돌하르방이 전시돼 있어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인상적인 곶자왈 산책길을 걸으며 서로 다른 모습과 크기의 돌하르방을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주원이는 이곳을 맨발로 산책한다 하더라고요. "우와~ 맨발이요? 우리 애들(발달장애인) 감각통합치료(작업치료의 일종)를 자연에서 하는 셈이네요"
아들이 맨발로 공원 길을 따라 걷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처음엔 감각이 낯설어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가 앞서가면 어차피 따라올 겁니다. 그렇게 간질간질 까끌까끌 축축 촉촉한 발의 감각을 느끼다 보면 아들 얼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요.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도가 있답니다.
공원 안엔 뒹굴뒹굴 누워서 편하게 놀 수 있는 어린이도서관도 있고, 과일차가 맛있는 카페도 있고, 한 가족이 전부 들어가서 누워도 공간이 남는 커다란 그물침대도 있어요. 발달장애인도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던 관장님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답니다.
편리함과 가성비 모두 잡은 숙소
'맘 편한 가게 지도'엔 숙소도 포함돼 있어요. 먼저 돌하르방 미술관 안엔 독채 숙소인 '숲속 돌집'이 3채 있답니다. 돌하르방 미술관의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인데요. 이 시간이 지나면 드넓은 미술관 전체를 내 마당처럼 자유롭게 단독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발달장애 자녀가 있는 세 가족이 모여 함께 여행을 다니는데, 독채가 3채라니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언젠간 이곳을 우리만의 마당으로 삼아 제주여행을 즐기리라 다짐해 봅니다.
다음 숙소는 선흘 동백동산 에코촌 유스호스텔입니다. 이곳은 제주도 제주시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는데요. 친환경 자립형 숙박시설로 2인실, 4인실, 단체실 등 다양한 크기의 숙소가 종류별로 있어요.
아주 잘 지어진 친환경적 넓은 야외 미술관 안에 단층 콘도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랄까요. 깨끗하고 편리하고 아름답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가격이에요. 저는 4인실에서 혼자 묵었는데요. 방1, 화장실1, 거실, 부엌까지 있는 숙소의 1박 가격이 8만 4000원입니다(10월 기준).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복지카드가 있으면 50% 할인을 받을 수 있대요. 그렇게 되면 4인 가족의 제주도 1박 가격이 4만 2000원이 됩니다.
4인 가족이 제주도 독채 숙소에서 3박4일을 머물러도 숙소 비용이 12만 6000원인 거예요. 50인이 머물 수 있는 단체룸도 있는데요. 단체룸 역시 복지카드를 소지하면 1박에 10만원으로 묵을 수 있답니다.
가격 얘길 듣는 순간 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 교무부장님에게 얼른 알려드려야겠다 싶었어요. 내년에 고3 학생들 제주도 졸업여행을 기획중이라고 들었거든요. 이곳이라면 안전하고 쾌적하면서도, 저렴한 가격 덕에 수학여행비를 확 낮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속적인 관리 운영을 위하여
'맘 편한 가게 지도'는 발달장애가족 지원사업을 하는 '행복하게 사회적협동조합'이 발달장애인의 부모들로부터 일일이 가게 정보를 모아 탄생하게 되었어요.
2022년부터 현재까지 가게 발굴과 모니터링을 이어가고 있고 식당, 카페, 미용실, 병원, 마트 등 총 10개 분야로 분류되어 있다고 합니다. 2022년 지도에는 93개, 2024년 지도에는 138개의 '맘 편한 가게'가 등록됐고요. 2025년엔 200개 등록을 향해 열심히 뛰고 있답니다.
올해부턴 카카오 사회공헌사업인 '인터넷하는 돌하르방' 지원으로도 이어져 지금은 카카오맵 검색창에 '맘 편한 가게'를 검색하면 전체 가게 정보와 위치를 바로 찾을 수도 있답니다.
사실 이날 동행했던 주원이 엄마가 '행복하게 사회적협동조합' 대표인데요. 제 눈엔 한없이 좋아보이기만 하는 '맘 편한 가게'였는데 운영하는 입장에선 나름의 고충도 있더라고요. 바로 지속적인 발굴과 모니터링이 큰 과제로 남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원이 엄마, '행복하게 사회적협동조합'의 김덕화 이사장은 말합니다.
"이런 사업은 제주도가 도 차원에서 직접 나서야 합니다. 지속성을 갖고 누가 담당하든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구축돼야만 해요. 그만큼 발달장애 가족들의 공공생활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거든요."
인정합니다. 민간을 통해 한두 번 반짝 이벤트처럼 나오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아닌 계속해서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당연한 제도, 정책으로 자리잡아야 해요. 오영훈 제주도지사님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인 듯합니다.
김덕화 이사장의 목표는 '맘 편한 가게'가 안산의 '오소가게'처럼 되는 것입니다. '오소가게'도 발달장애인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게인데요. 안산시는 아예 지자체 차원에서 '오소가게'를 지원합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더 많은 사회참여를 위해선 더 많은 '맘 편한 가게'와 '오소가게'가 필요해요. 제주도와 안산만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말이죠.
하지만 먼 미래의 어느날엔 '맘 편한 가게 지도'가 전혀 필요 없는 세상이길 바라봅니다. 발달장애가 있든 없든 그런 건 가게들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돼 있길 바라요. 그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에 '맘 편한 가게'가 마중물이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류승연 작가 scaletquee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