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요."
강신만(61)은 2019년 9월, 32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명예 퇴직했다. 2022년에 치른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본 투표를 닷새 앞두고 진보진영 단일화에 합의해야 했다. 최종 후보는 조희연(전 교육감)이 되었다. 이미 두 번의 교육감을 지낸 조희연 후보가 양보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행히 조희연 후보가 3선에 성공했다. 강신만의 통 큰 양보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에서 고통받고 있어요. 입시를 위한 경쟁, 학교 폭력, 차별적 대우 등의 문제로요. 저는 급식을 안 했을 때 무상 급식을 요구했어요. 제도와 정책을 바꿔야만 아이들의 행복도를 높일 수 있거든요. 교육감은 막대한 정책 결정자잖아요. 현직에서 경험을 해본 사람이 하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정치인과 교수들이 교육감을 하려고 해요. 초·중·고 교육은 대학 교육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요."
올해 10월에 있었던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에 강신만은 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이번에도 최종 후보는 교수직을 경험했던 사람이 되었다. 보수 후보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양보를 했지만 석연치 않은 것은 2022년 교육감 선거 때와 다르지 않았다.
28살에 강북의 석관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줄곧 담임을 맡았고, 높은 직책(교감, 교장)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강신만은 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다. 32년 동안 여덟 번 학교를 옮기면서 아이들을 만났다. 오랫동안 만났어도 아이들은 여전히 예쁘다. '이음나눔유니온'에는 이음나눔유니온의 창립 축하 공연 후 뒤풀이 자리에서 가입했다. 강신만은 축하 공연을 한 '종합예술단 봄날'의 단원이기도 하다. 봄날 활동은 2020년 7월부터 했다. 뒤늦게 시작한 합창단 활동은 그가 좋아하는 운동 다음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가 맡은 파트는 베이스다.
"요즘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합창이에요. 합창을 하면서 화음이 좋다는 걸 알았어요. 동료들이 저를 많이 챙겨줘요. 노래 실력은 다른 분들보다 좀 떨어지지만 재미있어요. 봄날의 무대는 주로 '거리'잖아요. 학생 운동할 때나 전교조 운동할 때는 시위 현장에 있었는데 이제는 제가 시위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자리에 있어요.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보람도 있고. "
교사로 32년 동안 아이들과 지내다가 퇴직을 하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강신만 조합원. 어쩌면 그의 인생 2막은 예견되어 있지 않았을까. 교육감이 되어서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합창은 나만 잘 부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음이 안 맞는 건 소리를 작게 해서 커버할 수 있지만 박자는 조금만 느리거나 빨라도 금세 티가 난다. 우주 최강 음치인 나는 합창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강신만은 더 화음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요즘은 합창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어렸을 때는 몸 쓰는 걸 좋아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어요. 종목은 가리지 않고 골고루 다 좋아합니다. 특기가 무술이에요. 학생운동할 때도 경찰에게 한 번도 잡히지 않았어요. 저 잡으려면 사복 경찰이 한 트럭이 와야 한다고 했죠(웃음)."
강신만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친구들의 연애 상담도 곧잘 해주었다. 상담자의 역할을 많이 했다.
"술 마시고 저에게 전화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웃음)."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지만 말없이 친구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던 강신만, 그에게도 아픈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집안이 정신없었다. 육성회비를 제 때에 못 냈다.
"등록금을 제 때 안 갖고 왔다고 선생님에게 맞았어요. 엄마가 안 줘서 안 갖고 왔다고 하니까 거짓말한다고 맞았고, 그 일로 학교에 가기 싫어서 안 갔더니 결석했다고 맞았어요. 학교만 가면 선생님이 때리니까 학교에 안 갔어요. 자주 맞다가 4학년 때 대보름날, 교실 책상을 친구들과 함께 학교 근처 동산으로 옮기고 모두 태웠어요. 소방차가 오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 일로 학교에서 잘렸어요.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잘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2년 정도 쉬다가 복교했어요. 5학년은 한 달 밖에 안 다녔어요. 바로 6학년이 되었죠."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뿐만 아니라, 지방의 사립학교는 아이들을 많이 때렸다고 한다. 특히 남학생들은 많이 맞았다. 학교에 정 붙이고 다닐 수가 없었다. 체육을 한다고 공부를 등한시했지만 교사의 폭력이 공부를 등한시하는 데 한몫했다. 강신만은 공부 대신에 무술을 아주 잘했다. 전국 대회에서 네 번이나 우승을 했다.
강신만은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1년 때인 1980년 5월, 학교에 낙서 사건이 있었다. 화장실 벽에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크게 쓰여 있었다. 유인물도 뿌렸다. 학교는 조사를 했고 범인을 잡았다. 낙서하고 유인물 뿌린 학생은 구속되었다. 그 학생을 석방시키기 위해 강신만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학생회장으로 출마한다는 것은 구속까지 각오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도 삼청교육대에 보낸 시절이다. 간선제 학생회였기 때문에 1, 2학년 반장들이 강신만을 학생회장으로 추대하고 접수를 하러 교무실에 갔다. 담당 교사가 강신만에게 물었다.
"너 성적이 '우' 이상 돼?"
"아니요. 저 대부분 '가'인데요."
"그러면 '가' 이새끼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수를 해야겠다고 우겼다. 그러자 선생님은 의자를 들고 강신만을 때렸다. 결국 등록을 하지 못한 채 교무실을 나왔다. 강신만을 추대한 친구들은 데모를 하자고 했다. 강신만도 그러고 싶었으나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날 이후 강신만은 태권도 도복을 박스에 집어넣고 공부를 했다. 고3, 1월부터 하루에 네 시간밖에 안 자고 미친 듯이 공부했다. 화장실 갈 때도, 밥 먹을 때도 책을 들고 살았다. 공부하다가 코피를 흘린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교사들의 폭행으로 공부할 결심을 한 것은 '역 교육'이라고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반발심에서 한 공부잖아요. 어쨌든 저는 그 사건을 계기로 죽도록(?) 공부했고 교사가 되었어요. '나는 그런 교사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면서요. 교사가 되어서 제일 먼저 없애려고 한 게 '반장, 부반장 뽑을 때 성적으로 제한을 두지 말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여전히 남아 있더라고요. 교사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안 바뀌었어요. 김대중 정부 때 이해찬 교육부 장관의 공문 한 장으로 성적 제한이 없어졌어요."
강신만은 교사가 되고 전교조에 가입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수십 년 넘게 있던 촌지를 없앴고, 교장의 제왕적 권위주의를 민주적으로 바꿨다.
'미국 태권도 선생님'이 꿈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선생의 폭력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반드시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 4학년 때 교생실습을 하러 가서다. 6주 간의 교생실습을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 원래 그의 계획은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하버드대로 유학을 간다'였다.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공하고 미국 전역에 태권도를 알리는 게 꿈이었다. 미국에서 먼저 자리 잡은 선배들이 도와준다고도 했다. 장밋빛 꿈은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하는 것'까지만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미국 이후의 계획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고 교육운동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시대적 책무 때문이에요. 원래 꿈꾼 길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있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좋아하는 길(미국에 가서 태권도를 알리는)을 걷고 싶어요."
비록 좋아하는 길로 가지 못했지만 교육 운동의 길은 계속 가기로 했다. 강신만은 현재 '생태 중심 교육 추진단' 단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교육의 비전을 생태 중심으로 놓고 교육의 시스템을 생태적으로 바꾸는 활동을 한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왕따 시키는 학교가 아니라, 공존하고 상생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에 앞장서는 일이다. 치열한 경쟁 교육이야 말로 지구를 위기에 빠트린 주범이다. 공존하고 상생하고 인간 중심의 교육을 하려면 인간도 자연계의 하나라는 생태중심으로 가야 한다.
"지금 아이들의 삶은 다 망가져 있어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잘하는 대로 망가지고 못 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대로 열패감 때문에 망가지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어요.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기고요. 그래서 교육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해요. 배제와 차별이 아니라, 공존하고 상생하는 협력의 공동체로 학교가 나서야 해요. 그러려면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이걸 연구하고 있어요.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데 정치인들의 세계관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어요. 정치인들의 세계관은 교육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어요."
"'노인'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노인'이 되는 거예요"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던가. 교사 생활을 마쳤어도 여전히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강신만.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해서인지, 밥그릇 싸움에만 관심 있는 권력자와 정치인을 바로잡기 위해선지, 세상을 향한 강신만의 열정은 식지 않고 있다. 자신의 활기찬 인생 2막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들어보았다.
"'노인'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노인'이 되는 거예요. 그다음은 '죽음'이죠. 이음나눔유니온은 도식화된 경로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자연 앞에서 100살은 노인이 아니에요. 어린이에 불과해요. 죽어서 자연에서 영생하는 길이 있는데 왜 '노년', '노인'이라는 말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가난하면 최소한의 노동을 하면서 살면 되고요.
제 친구 중 한 명은 유난히 빨리 늙더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나이 들었고, 이제 다 살았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본인이 늙었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몸속의 세포들도 덩달아 손을 놓아요. 의식부터 바꿔야 해요. 저라고 늙었다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의지로 극복하는 거예요. '100살은 어린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에너지를 만들어요. 그러면 세포들도 덩달아 젊어지죠(웃음).
한 가지 더,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나눠야 해요. 목공 했던 사람은 목공 기술을 나누고,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 찍는 기술을 나누고.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정부에 일자리를 만들라 하고요. 나이가 들수록 밖으로 나와야 해요. 이음나눔유니온이 고립된 분, 외롭게 사는 분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
'100살은 어린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100살은 어린이'라는 마인드를 갖는 게 쉬운 일일까. 강신만의 젊은 마인드, 에너지 넘치는 인생 후반의 구상을 닮고 싶다. 끝으로 강신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교육 운동을 했던 사람인만큼 좋은 교육 운동가로 남고 싶습니다. 학생들의 행복을 위한 교육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전교조도 버릴 수 있어요(웃음). 전교조는 아이들의 행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잖아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음나눔유니온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