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음악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2016년 우연한 기회에 SBS '신의 목소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됩니다. 당시 소속사도 없이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인 2017년에는 방송 Mnet 주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에 개인 연습생 자격으로 지원합니다. 이후 그는 워너원의 메인보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개인 뮤지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인기 가수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지난 2015년 처음 만났습니다. 갓 20살이 된 앳된 얼굴의 순수한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사회에서 만난 친한 후배를 만나는 자리에 그도 동행해서 함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음악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노래만큼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저는 절대 남을 위로해 줄 수 없을 듯합니다. 완전 박치에 음치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가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경찰관인 저를 보고 많이 신기해했었습니다. 경찰 업무에도 궁금한 게 많다며 많이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경찰서에 견학을 가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몇 개월 뒤 제가 근무하던 경찰서에 진짜 왔습니다. 그때도 그는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평범한 대학생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와 함께 근무하는 친한 경찰관 후배도 같이 만났습니다. 그 후배는 얼마 전에 글을 썼던 '어머니 발톱을 깎아 드리기'로 내기를 했던 바로 그 후배입니다.
[관련 글] : 어머니 발톱을 깎아 드리고 생긴 일
경찰관 후배와 음악을 전공하던 대학생 동생을 경찰서 주차장 한쪽에서 만나 소개해 줬습니다.
"형이랑 같이 근무하는 후배 경찰관 이규웅 순경이야. 나보다 더 경찰관 같이 안 생겼지? 이제 3년 차라 그래. 조금만 더 지나면 확 달라질 걸…."
"안녕하세요. 저는 김재환입니다. 남자애들 어려서는 장래 직업으로 경찰관 한 번씩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진짜 멋있는 거 같아요."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후배 이규웅 순경입니다. 노래하는 분들이 훨씬 멋지죠. 저도 노래를 못해서 너무 부러워요."
"규웅아 경찰 업무 좀 리얼하게 소개해줘 봐. 내가 그럴 짬은 아니잖아."
"네, 알겠습니다. 대신 나중에 저 결혼할 때 축가라도 해 주시는 건가요?"
"그럼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음악을 계속할 거고 누구나 제 노래를 알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결혼하실 때는 꼭 유명한 가수가 되어서 축가를 불러 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재환아 너 그렇게 약속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진짜 약속한 거야?"
"형님. 물론이죠. 오늘 덕분에 경찰서도 구경하고 너무 재밌었는데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축가도 불러 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멋진데..."
그 자리에서 언제일지도 모를 결혼식 축가에 대한 약속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했던 가수는 바로 김재환 군입니다. 그와는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 군인입니다.
그때 만난 제 경찰관 후배가 지난 주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외출을 나올 수 있는 김재환 군이 자신의 곡 '달팽이'를 축가로 불러줬습니다. 무려 8년 전 약속이었지만 결국 지킨 겁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약속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이 맞나 봅니다.
물론 김재환 군이 군대 입대 전에 이미 후배의 결혼식 날짜가 잡혔었습니다. 그래서 입대를 앞두고 있던 김재환 군에게 축가를 부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확답할 수 없었습니다. 가능하면 축가를 불러주는 정도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외출을 나와 노래를 해줬던 겁니다.
8년 전, 그것도 데뷔도 하기 전에 했던 약속인데 의리를 지켜준 김재환 군에게 너무나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결혼한 후배인 신랑과 신부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더욱 뜻깊은 결혼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앞으로 이 사람과는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래 만날 것 같은 사람과 금방 연락이 끊기기도 합니다. 반면에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오랜 인연으로 관계가 유지되기도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좋은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지킬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일을 상대방은 기억하고 있다가 깜짝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했던 약속을 몇 년이 지난 뒤에 꺼내며 지켜줄 때는 더욱이나 감동입니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많습니다.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상대가 지키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상처도 두 배로 더 받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이나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막연한 약속'을 하는 것이나 우리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안 좋았던 인연은 좋은 인연이 새롭게 나타나고 지키지 못한 약속은 뜻하지 않은 약속이 지켜지면서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직장 내에서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위치가 되면 새로운 인연을 귀찮아하고 안전한 약속만 하려고 합니다. 가끔은 그게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태도가 틀린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았던 약속이 이뤄지는 기쁨을 얻고 싶다면 그리고 지금까지는 만나보지 못했던 더 좋은 인연에 대해 설레고 싶다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음으로 오늘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허황되지 않은 꿈을 꾸며 좋은 인연도, 뜻하지 않았던 약속도 지켜지는 것을 기대해 보려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박승일의 경찰관이 바라본세상에서)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