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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형은 선경스마트 자전거를 사지 않았다. 3000리호 자전거 사오던 초등학교 5학년 5월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나는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가 무척이나 지루했다. '저걸 타 봐, 말아?' 고심 끝에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형 자전거 사온 첫날 박살내다

마당이 깊은 집이라 오르막 대문을 나서다가 한번 고꾸라졌다. '어 이거 잘 안 되네. 동네 형들은 잘만 타던데?' 첫날 자전거와 대면은 그렇게 시작했다. 자꾸 넘어지려는 통에 뒤로 돌리지를 못하고 앞으로 밀려가는 힘에 끌려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기우뚱 똑바로 가지 않고 땡볕에 엿가락이 휘듯 휘청거렸다.

마을 앞 훤한 길이 나오자 욕심이 생겼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갖고 나온 것 한번 타보지 뭐. 조심히 타면 이상 없을 거야.' 키 작은 나는 자전거 발판(페달)에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은 힘차게 땅을 박차 운전대를 꼭 움켜잡고 20~30m 앞으로 나아갔다.

넘어질 것 같으면 다시 내려서 똑같은 동작으로 몇 번이나 반복하여 발을 굴려 공동 우물 앞 동네 입구를 지났다. 걷는다면 이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 붕 뜬 기분에 취해 얼떨결에 새로운 기계를 다루다보니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다리거리가 나왔다.

멈출 줄 몰라 조금 더 가다보니 바로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다.

"어! 어! 어!"
"콰당!"
"지미! 아이쿠."

자전거와 한 덩이가 되어 반대편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엎어진 채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재수대가리가 없었는지 바닥에 곧바로 부딪혀 무릎 주위 옷이 찢겨 살이 드러났고 피가 주르르 흘렀다.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이빨에서도 피가 난다. 침을 한번 뱉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출발하려는데 웬걸?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굴러가야 할 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 멀쩡하던 자전거가 나랑 한번 나자빠졌다고 꿈쩍도 않는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거 불량품 아니야?' 오늘 사온 완전 새것이 이 모양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을 쓰며 간신히 끌고 와 집에 세워두고 쿨쿨 잠을 자는 척했다. 어른들을 조르고 졸라 얻게 된 새 자전거가 오늘 온다고 하니 다른 데로 새지 않고 평소보다 일찍 형이 집에 왔다. 형은 자전거 페달을 돌려보더니 문제점을 금방 파악하고 나를 부른다.

"규환아, 규환아 얼렁 나와 봐."
"……."
"후딱 안 나오고 뭣한다냐."
"왜에?"
"자전거 왜 이렇게 된 것이여?"
"몰러 나도. 타볼려다가 안 굴러간께 그냥 냅둔 것이여. 바람에 넘어갔겠제."
"솔직히 이야기 해보라니깐."
"참말로 모른당께. 나 안 그랬어. 성은 왜 나만 갖고 그래?"

따지듯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뒤안에 가서 빠루하고 망치 좀 갖고와봐."
"왜 그런 걸 나한테 시켜? 머리 아파 죽겄구만."

그날따라 형은 그 자전거의 운명이 이것이라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채근하지 않고 하던 일을 했다.

누더기가 된 자전거 고치다 판나겠네

사실 안장에 올라가 앉아보지도 못하고 한 발로 굴렸다가 두 발을 동시에 페달에 올리고 몇 십m 가보는 게 내 첫 자전거타기였다. 넘어지면서 반대편 페달이 먼저 돌에 부딪혀 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크랭크축과 페달이 차체에 붙게 되어 중고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미안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판금 기술이 있었더라면 거의 원상태로 돌려놓았겠지만 망치로 두들기고 집에 있던 작대기 죄다 부러뜨리고 쇠몽둥이까지 동원한 끝에 한나절을 고생하여 볼썽사납고 흠집투성이인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그 문제투성이 자전거를 기분 잡쳐서 타게 만든 일로 두고두고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형이 중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바닥을 굴려서 타느라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른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중학교 3학년이던 형이 취업을 나가자 그 못난 자전거가 내 차지가 되었다.

차차 익숙해지고 균형을 잡게 되자 나는 5~6m를 굴려 안장에 가까스로 타고는 이십 리가 다 되는 중학교로 향했다. 자전거는 첫날 나와 만남이 불쾌했던지 쉬지 않고 말썽을 부렸다. 자전거만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첫날부터 중고품 신세였으니,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나였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타는 수밖에 없었다.

체인 덮개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달가닥거려 신경을 건드리니 얼마가지 않아서 덮개를 빼버렸다. 게다가 체인은 얼마나 자꾸 벗겨졌는지 끼워서 타느라 그리스 기름때에 절어 살았다. 뿐인가. 튜브 속으로 모래가 일주일이 멀다하고 들어가 실빵꾸(펑크)를 냈고 가시에 찔리면 이삼 일은 방치해야 한다.

주말 오후 헌 '주부'(튜브)를 구해 '빵구'(펑크)를 때우다보면 좋은 시절 빠르게도 지나갔다. 튜브에 바람을 넣어 비눗물이 담긴 대야에 담가보면 실실 공기가 새나온다. 볼펜으로 둥그렇게 표시를 하고 물기를 말끔히 닦는다. 사포(砂布)로 쭉쭉 문지르고 고무 조각을 잘라 한쪽을 다시 문대 양쪽에 본드를 칠해서 잠시 두면 살짝 굳는다.

이때다 싶을 때 정확히 갖다대면 펑크가 때워진다. 휠과 타이어 사이에 튜브를 밀어 넣고 공기를 채우면 다시 탈 수 있지만 간혹 급히 밀어 넣다보면 실패하기도 하는 귀찮은 일이었다. 본드가 좋지 않아 며칠 안에 떨어지는 수도 있었으니 100원 아껴서 고구마 튀김 사먹으려던 계획은 절반이나 수포로 돌아갔다.

자전거포까지 끌고 갈 수 없으니 직접 자전거 박사가 되어야 했으나 나는 손재주는 없는 기계치(機械癡)라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본드 냄새에 취했던 나날이었지만 중고교 다닐 때도 그따위 짓을 한번도 안했던 건 그 때 이미 내성이 길러진 때문일까.

오르막, 내리막, 깔끄막과 커브길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서 출발하여 원리마을까지 4km는 가만히 있어도 자전거가 제 스스로 내려간다. 6.25 때 지서와 면사무소가 있던 400여 가구나 되는 큰 마을 끝부터 1차 오르막이다. 다시 조금 가다보면 500m쯤이나 되는 경사 급한 길이다. 오르막길에선 안장 위에 서서 타도 한두 아이 빼고는 넘지 못했으니 내 자전거 통학은 순탄치 않았다.

포장되지 않는 도로라도 평상시대로라면 별 문제 없었으나 국도관리소에서 가끔 불도저로 판판하게 다듬는다고 쭉 밀어버리는 통에 돌 자갈 천지라 자갈 피해 이리저리 곡예를 하다보면 속력을 낼 수 없었다. 다시 길을 내려가면 완전한 내리막길을 달리면 학교가 나온다.

반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출발부터 가파르다. 숨을 고르고 평탄한 길을 조금 지나면 아침에 끙끙대며 자전거를 끌고 올랐던 제일 긴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그날따라 '삑삑' 긁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는다.

길게 쭉 뻗어 시야가 확보된 길이라 앞 브레이크에 의지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내쳐 달렸다가는 4~5m 낭떠러지 아래로 구를 것이기에 아이들은 벌써 멀찌감치 멀어져 가는데도 나는 속력을 거의 줄여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경사진 끝자락에 다다르자 안도의 숨을 쉬고 브레이크를 풀고 몇 백 미터 질주했다. 또 다시 내리막길이다. 큰 마을 원리로 접어들 무렵 으스름한 저녁이 다가온다.

"어? 버스 올 때가 됐는데? 어쩌지?"

이미 나는 가파르고 앞이 40여m 밖에 확보되지 않은 길로 접어들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를 태운 자전거가 자갈밖에 없는 길바닥을 마구 흔들리며 전속력으로 내려간다. 밭가에 가깝다면 밭으로 처박아서라도 이 상황을 모면해보겠는데 어쩌질 못하도록 위급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굴에서도 살아남지 않는다던가. 커브 길에 가까워지자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박아버리지 뭐.'

언제고 반대편 백아산휴양림 쪽 수리마을 학생들을 실어 나르는 통학버스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버스에 들이박느니 나는 내 목숨을 부지하려고 차악(次惡)을 선택했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눈을 꾹 감고 듣지도 않는 앞 브레이크를 무의식적으로 사정없이 쥐었다.

"콰당!"

앞이 캄캄했다. 어디엔가 부딪히더니 별이 반짝 떴다. 이내 멍하더니 세상이 허옇다.

그 몹쓸 자전거와 나는 한 덩어리가 되어 붕 떠서 공중 곡예를 한바탕 치르고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몇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선 뒤 쭈욱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탱자나무는 내 옆에 있지도 않았다.

기우(杞憂)였다. 순진한 내 몸이 호되게 당하고 나서 조금 남은 정신을 추슬러 자전거를 바깥으로 꺼내 몇 걸음 걸으니 아직도 버스는 마을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하마터면 자전거와 운명을 같이할 뻔했다.

며칠 간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그날로 난 청바지 하나를 부엌에 처넣어버렸다. 그 뒤로는 한가한 주말과 내 첫사랑 소녀 집을 방문할 때만 골칫덩어리 자전거와 동행했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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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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