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에 부서지는 보고 싶은 얼굴

[태종 이방원 173] 어리 생각에 빠진 세자

등록 2007.10.08 15:40수정 2007.10.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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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사진입니다. 두물머리에서 찍었습니다. ⓒ 이정근


훈풍을 타고 나룻배가 강심을 향하여 미끄러져 갔다. 하늘도 푸르고 산천초목도 푸르다. 맑고 쾌청한 날씨다. 콧속을 드나드는 강바람이 싱그럽다. 나룻배의 승객들은 하나같이 들떠있었다. 강을 건너면 새로움과 만나기 때문이다. 이윤이 목적인 장사꾼은 어떤 손님을 만날까 기대에 부풀어 있고, 선보러 가는 신랑은 색시가 얼마나 예쁠까 설레고 있었다.

“저기 촌닭 같은 놈은 누구야?”
“글쎄, 양반집 자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따위 말이 어디 있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사대부집 자제 같아.”

“저놈이 사대부집 자제라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어?”
“갓끈이 상아영(象牙纓)이잖아.”

“이런 곰탱이 같으니라구, 얌마, 저것이 어찌 상아구슬이냐? 주영(珠纓)이지.”
“그렇다면 저놈이 양반 행세하려고 가짜 구슬을 달았나?”

“그럴 수도 있지. 노비변정 후에 돈 가지고 양반이 된 놈이 있으니까.”
“아휴 속 터져, 포졸들은 뭐하고 저런 놈을 안 잡아 간다지?”

“말조심들 하시라요. 저분은 세자 저하이십니다.”


옆자리에 있던 사나이가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무게감이 있었다. 행색은 하인배 같았으나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풍모였다.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에 세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나이는 양녕을 알고 있었지만 세자는 모르는 사나이였다.

바짝 따라붙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


조금 전까지 수근 거리던 부보상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행장이라곤 초라하기 그지없는 젊은이가 세자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가가 확인할 일도 아니다. 입방아를 찧어대며 세자를 능멸했으니 죽어도 싸다. 도망가고 싶지만 여기는 강물 위에 떠있는 나룻배다. 도리가 없다. 머리를 바닥에 박는 수밖에 없었다.

“것 봐 내가 상아영(象牙纓)이라고 했잖아.”

양녕의 갓끈에 매달린 구슬이 상아라고 했던 자가 옆 자리에 엎드려 있는 부보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찔림을 받은 부보상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갓끈을 살펴봤다. 틀림없는 상아(象牙)였다. 갓에서 턱을 향하여 수직으로 매달려 있는 구슬이 유난히 돋보였다.

상아는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아 당화선(唐貨船)을 통해서 들어오는 귀중한 물건이다. 그러한 상아로 갓끈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세도가 아니고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화는 명문세력가의 전유물이었다. 이러한 물건은 세계의 중심 명나라에서 들어왔다. 당나라 전성기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대륙의 진귀한 물건은 모두 당화(唐貨)라 칭했다.

뱃머리 쪽에서 수군대던 부보상이 짐 보따리는 그대로 놔두고 사람들을 헤치며 선미(船尾)쪽으로 향했다. 세자가 있는 곳과 멀어지기 위해서다. 세자에 대한 입방아를 더 찧어대고 싶은데 세자의 귀에 들어 갈까봐 겁이 났다. 뛰어봐야 벼룩이라고 그래도 배 안이다. 선미에서는 사공이 뱃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부딪치는 파도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오는 놋 소리 처량도 하구나
망망한 해도 중에 북을 울리며 원포귀범으로 돌아를 오누나
만경창파에 몸을 실리어 갈매기로 벗을 삼고 싸워나 가노나
창창한 물결에 유랑한 소리는 이내 성중 어적이 분명하고나
낙조 임강에 배를 띄우고 술렁술렁 노 저어라 달맞이 가잔다.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굿거리장단에 율동적인 가락이 구슬프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삼배수건으로 문지르며 사공은 계속 흥얼거린다. 뱃놀이 가자는데 가락은 왜 이리 슬픈지 모르겠다. 노동을 놀이로 승화시키려는 안간힘이 애처롭다.

“세자라는데 시종하나 없고 호위군사 하나 없냐?”
“그러게 말이야. 도승관이나 포졸들도 아는 채도 안하던데.”

“아무래도 가짜 같아.”
“따라붙는 저놈도 수상해.”

세자에 대한 험담을 제지하던 사나이를 쳐다봤다. 그 사나이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더 이상 세자에 대하여 입방아를 찧어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저놈들이 우리한테 등친 일 없으니 믿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세자 저하를 욕했으니 죽을 일만 남았지.”

키가 큰 부보상은 겁에 질려있었다. 사나이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옆자리의 친구마저 죽을 일만 남았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겁이 났지만 입이 간지러웠다. 부보상들은 화제를 이어갔다.

정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더냐?

“세자가 여자한테 빠져서 임금한테 경을 쳤다고 선의문 저잣거리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래 맞아. 어리라는 여자라고 나도 그 소문 들었어.”

“좋긴 좋은가 보지?”
“명기는 따로 있단다.”

수군대던 부보상이 키득거렸다.

“정(情) 중에서는 색정(色情)이 제일 무섭다고 색정 들면 누구도 못 말린단다.”
“네가 첫정인지 색정인지 어떻게 아냐?”

“거야 뻔할 뻔자지. 조강지처에 자식 있는 사내가 여자에 빠지면 색정 말고 뭐가 있겠냐?”
“맞지, 맞는 말이고말고. 색정에 빠지면 패가망신에 인생 망치는 것이지.”

“그러니까 상감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 가는 거지.”
“건 그렇고 세자는 이거 된 거야?”

부보상이 자신의 목에 손을 갖다 대며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나룻배가 강심에 이르렀다.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사나운 물결이 뱃전에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부서지는 물결을 바라보던 양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결에 어리가 있었다. 분명 창백한 웃음을 머금은 어리의 얼굴이었다. 다시 한 번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어리의 모습은 없었다.
#세자 #양녕 #색정 #부보상 #나룻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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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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