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공존할 수 없었던 발칙한 생각

[태종 이방원 174]양녕과 태종의 파멸의 원인

등록 2007.10.10 08:43수정 2007.10.1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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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나루터 경기도 파주 임진리에 있다. ⓒ 이정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화창한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또 다시 배가 흔들렸다. 억센 물결을 만났나 보다. 고개를 꺾어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던 흰구름의 반영(反影)이 수면 위에 흘러가고 있었다. 물결에 출렁이는 반영이 어리의 모습이었다. 하얗게 웃고 있었다.

'어리가 보고 싶다. 지금쯤 어디 있을까?'


가슴이 뛰었다. 보고 싶었다. 강물에 어리가 있다면 뛰어 내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곤혹을 치렀을까? 세자를 사랑했다는 죄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가슴이 저려온다. 유난히 입술이 예쁜 어리가 많이 많이 보고 싶다.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역수한파 저문 날에 홀로 앉았으니 돛대 치는 소리도 서글프구나
창해만리 먼 바다에 외로운 등불만 깜박거린다.
연파만경 수로창파 불리워 갈제 뱃전은 너울너울 물결은 출렁
하늬바람 마파람 마음대로 불어라 키를 잡은 이 사공이 갈 곳이 없다네
부딪치는 파도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오는 놋 소리 처량도 하구나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사공의 뱃노래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구슬프다. 자신의 마음을 사공이 대신 읊어주는 것만 같았다. 양녕은 흔들리는 뱃전에 몸을 맡긴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서연에서 빈객이 가르쳐주던 대학(大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대인(大人)과 군자의 학문(學文)이라 일컫는 대학의 첫 구절이었다. 명명덕(明明德)이다. <상서>의 '강고편'과 '태갑편'을 인용하면서 주를 달아주던 변계량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康诰曰 克明德. 太甲曰 顾 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밝은 덕을 부여한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 선한 덕을 밝힐 수 있다)



이 부분이 평소에 가슴에 꽂히는 의문 부호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난해했고 오늘따라 절절했다.

덕이 작위적이라면 사랑은 자연적이다

'군자의 덕목이 덕이라면 인간의 덕목은 무엇일까? 사랑이라 정의해도 하등 부족함이 없잖은가? 부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인간의 삶이 곧 사랑이다. 덕이 작위적이라면 사랑은 자연적이다. 군자가 하늘이 부여한 덕을 밝히듯이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밝은 사랑을 부여한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 선한 사랑을 밝힐 수 있지 않은가?'

발칙한 생각이다. 부적절한 관계를 감히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공자가 놀랄 일이다. 하지만 양녕은 어리와의 관계를 사랑이라 설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 20세기에나 있을 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나에게 어리를 사랑하라는 명을 부여한 것이며 나는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 사랑을 밝힐 수 있다.'

세상을 향하여 악이라도 써보고 싶었다. 어리와의 사랑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싶었다. 사랑을 사랑이라 밝히는데 누가 돌을 던지랴 싶었다. 돌팔매를 맞아도 밝히고 싶었다.

'세상은 왜 만물의 흐름을 흐름 그 자체로 놔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작위하려 할까? 이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에 거스르는 생각과 행동이 아닐까? 만물을 바꾸려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어리와의 사랑도 제발 간섭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정말 바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왜 어리와의 사랑은 안 된다고 할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사이로 갈매기 한 쌍이 끼륵거리며 정답게 날고 있었다.

'아니야. 난 세상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에게 부여된 어리와의 사랑은 밝힐거야. 난 어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도 뛰어넘을 것이고 어리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왕좌(王座)도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시대와 공존할 수 없는 도발적인 사상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양녕이 사상의 근저로 생각하고 있는 무위사상(無爲思想)은 도가의 사상으로 처음에는 유가에서 배척받았다. 후에 유가에서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자연행위는 완성된 행위라고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명명덕 다음에 나오는 대학 3강령 중의 하나 지어지선(止於至善). 참 좋은 말이다. 선(善)한 것은 끊임없이 추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선(至善)은 절대선이 아니다. 상대선이다. 상대가 선으로 받아들였을 때 선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허나, 아버지가 선(善)이라 표방하며 후궁들을 가까이 했을 때, 어머니도 선이라 받아들였을까?'

마음 고생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몸종을 가까이 했을 때 제일 힘들어 했던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최근 소선 옹주를 가까이 했을 때도 어머니는 고통스러워했다. 태종은 조선 역대 왕 중에서 2번째로 많은 후궁을 둔 군주였다.

불경스럽다. 아버지를 넘어 임금에게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반역으로 처단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양녕의 사상이었다. 누백 년을 앞서가는 사고방식이다. 이 논리로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던 양녕은 결국 파멸하고 말았다. 시대와 공존할 수 없는 도발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양녕은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았다.

'침략을 받은 나라가 악이라 규정해도 명나라가 변방을 공격할 때 선이라 칭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이라 주장하며 어리를 가까이 한다면 곧 선이지 않은가? 어차피 선이란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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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 마을 경기도 파주에 있다 ⓒ 이정근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김판서의 딸을 맞이하여 장가들었다. 숙빈은 내가 선택한 여자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숙빈이 악이라 규정해도 내가 어리를 선택한 것이 선이라 생각한다면 선이지 않은가?'

비약이 이기를 낳았다. 평소 공부 안 한다고 핀잔을 받던 양녕이다. 부왕에게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심오한 대학(大學)을 자신에 맞게 해석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합리화할 정도면 공부를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 나룻배가 파주 임진리에 닿았다. 짐 꾸러미를 짊어진 부보상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갔다. 양녕이 말을 끌고 뱃전을 나서려 할 때였다.

"저하, 소인이 뫼시겠습니다."

양녕이 쥐고 있던 말고삐를 붙잡았다. 나룻배에 동승했던 사나이였다.

"네가 누구냐?"
"저하를 모시고 싶어 개성에서부터 따라나선 김인의라 하옵니다. 거두어 주소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선한 얼굴이다. 시선이 마주쳤다. 착한 눈이다. 느낌이 좋다. 양녕은 말고삐를 사나이에게 넘겨주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김인의가 말고삐를 잡았다. 견마잡이가 생겼으니 외롭지 않았다. 인의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명명덕 #강고편 #지어지선 #대학 #태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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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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