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독일산' 원자폭탄 장담하는 하이젠베르크

[김갑수 역사팩션 132회] '열두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10 12:12수정 2008.10.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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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이 참여하려는 프로젝트

임주호의 부친 임용희는 미국에 있는 딸 수경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기일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불효에 대해 먼저 용서를 구했다. 딸은 중년을 넘긴 아버지의 외롭고 힘겨운 삶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동생 주호에 대해 염려하는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님께서는 조심스럽게 저의 국적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딸에게까지 그렇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든 것이 혹시 저의 불민 때문이 아닌지 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아버님, 국적 문제는 가족의 우애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제 국적 변경 문제에 대해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그것은 주호가 반대할 것입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주호는 자아가 강하고 예민한 청년입니다. 이곳 프린스턴에 있는 어떤 서구인도 주호보다 개성이 강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주호처럼 주관이 뚜렷한 아이는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모르긴 해도 누나가 국적까지 바꿔 자기의 유학길을 뚫었다고 한다면 주호는 분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님, 그 문제는 자식들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임용희는 여기까지 읽고 나서 천정을 쳐다보았다. 여러 가지 상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다소 상투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은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자식만은 안 된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아버지도 그런 말을 자기에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가 젊은 사람들에게 뒤쳐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젊은이들이 흔히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존재라고 하는데, 자기도 이미 젊은이들에게 답답한 존재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아들 주호가 반발했을 때만 해도 아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고 현실을 몰라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자기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딸까지 아비의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읽으니, 그는 자기의 불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졌다. 그러자 죽은 아내가 불현듯 그리워졌다.


그는 자동차를 준비시켰다. 아내의 무덤에 가보고 싶었다. 차에 오른 그는 또 한 번 후회감이 들었다. 자신의 행동이 즉흥적이고 감상적이라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니 늙은이 소리를 듣게 되는 법이라고 혼자 말하며 허허로이 웃었다. 그는 교외의 가을 단풍을 보며 차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딸의 편지를 꺼내 다시 읽었다.

사실은 아버님께 아주 중요하고도 화급한 문제를 상의 드리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어제 저는 제 신상에 관한 제의를 받았습니다. 저에게 제의한 분은 아인슈타인 박사로서 세계적인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이곳 프린스턴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숭배 받고 있습니다. 그는 요즈음 학문 연구는 손을 놓았지만 이곳에서의 발언권은 누구보다도 강한 학자입니다.

그는 저에게 미국 정부에서 주관하는 모종의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갈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 기약할 수 없는 일정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파격에 가까운 처우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계적인 현역 물리학자들이 다수 모인다는 정도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제가 수락을 하면 개인적으로 부탁할 것이 있어서 추천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버님, 제가 어떻게 결정해야 좋은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받을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전보로 지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임용희는 운전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말했다.

"경성우체국으로 가자."

차가 메이지 제과 앞에 이르러 맞은편에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딸에게 보낼 전보 내용을 확정지었다.

'너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를 알려다오.'

미국, 한 발 늦게 원자탄 개발에 뛰어들다

미국 정부와 핵물리학자들의 첫 모임이 이루어진 것은 1939년 10월 21일 워싱턴에서였다. 임수경이 대신 쓴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루스벨트에게 직접 전한 사람은 루스벨트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작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루스벨트의 경제 관련 참모 역할을 했으며 해당 분야 연설문을 작성해 준 인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작스에게 임수경의 자문을 받도록 했다. 작스는 우라늄에 관해 여러 가지 것을 임수경에게 물었다. 다음 날 루스벨트에게 간 작스는 원자력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설명했다. 첫째, 원자력으로 전기를 얻는 문제, 둘째, 방사능 물질을 의학적으로 활용하는 문제, 마지막으로 연쇄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이었다.

물론 작스가 강조한 것은 마지막 원자폭탄의 문제였고, 이것은 이미 독일에서 연구에 착수했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말했다. 요컨대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게 되면, 이미 영국·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해 있는 독일이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을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었다.

"각하, 독일이 미국을 침공하지 말란 법은 없잖습니까?"

이렇게 해서 미국 정부위원회와 핵물리학자들의 정례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처음 정부위원과 과학자들의 의견은 구구각색으로 개진되었다.

"중성자를 우라늄에 충돌시켜 에너지를 얻는다는 발상은 손으로 구름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느린 중성자라면 가능합니다."
"페르미가 말하는 분열 물질은 자연에서 발견되지도 않았고 실험실에서 생성된 적도 없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의 무기가 아니고 군인들의 사기입니다."
"우라늄 1킬로그램 폭탄의 위력은 고성능 폭약 2만 톤과 맞먹습니다."
"문제는 우라늄 235를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재 순수한 상태의 우라늄 235는 단 1킬로그램도 지구에 없습니다."

매번 회의 내용이 요약되어 루스벨트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보고는 차츰 폭탄 제조의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바뀌더니, 마침내 정부의 적절한 지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한편 독일의 상황은 더욱 긴박했다. 이미 독일 육군은 핵분열 연구 기관을 통합시켰고, 원자폭탄 개발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극비 회의를 소집해 놓고 있었다. 물리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베를린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조선 물리학자 임수경을 좌절시킨 빌헬름 연구소의 오토 한은 물론 1순위로 차출되어 있었다.

극비회의가 소집된 것은 1939년 9월 16일 베를린에서였다. 이것은 미국보다 35일 앞선 시점이었다. 과반수의 과학자들이 오토 한의 주장에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처음에 각인각색의 구구한 의견이 개진된 것은 미국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2차 회의에 하이젠베르크를 불러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그는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과 필적되는 양자론 구축의 결정적 공로자였다. 그들은 2차 회의에서 벌써 우라늄 235를 얻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논의하게 된다.

"느린 중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2차 중성자를 다시 감속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라늄 235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속재를 얻을 수 있는 소스를 알고 있습니다."

천연 우라늄 광석에 우라늄 235가 0.7% 함유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나머지99.3%는 우라늄 238이었다. 폭탄 제조에는 핵분열 물질인 우라늄 235만 필요했다(물론 얼마 후에는 플루토늄 239도 핵분열 물질임이 알려진다. 이것은 원자로의 핵폐기물을 화학적으로 처리하면 추출된다).

그런데 우라늄 광석에서 우라늄 235를 분리 추출하려면 느린 중성자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성자를 감속시킬 수 있는 감속재를 만드는 일이 결정적인 관건이었던 것이다. 독일 우라늄 개발 연구의 책임자로 결정된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폭탄 개발을 자신하면서 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우라늄235 #하이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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