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은 서민적인 마을? 개념 바꿔야

[09-005] 낙안읍성은 낙안군수가 자리하던 곳, 개념 바로 세워야 전통 이어져

등록 2009.07.29 16:52수정 2009.07.3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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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내에 있는 객사 건물로 한 가족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입장하고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 내에 있는 객사 건물로 한 가족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입장하고 있다 ⓒ 서정일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樂安邑城)은 1397년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을 주변을 흙으로 쌓아 올린 것이 그 시초다. 이후 석성으로 개축했으나 일제강점기, 6·25 동란, 새마을운동 등을 거치면서 일부가 허물어졌는데, 지난 1984년 민속마을 조성을 시작한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지금의 성곽 모양을 갖추게 됐다.

 

민속마을로 조성되기 이전의 낙안읍성은 1908년 10월 15일 폐군되기 이전의 낙안군(순천 낙안, 보성 벌교, 고흥 동강 등의 지역) 치소(治所)로, 문화재급인 객사와 임경업 장군 비각 등의 건물들과 일부 초가집이 전통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상당부분 현대적 모양새로 변형됐던 곳을 1984년 동헌과 내아 등을 신축하고 양철, 슬레이트집으로 개조된 민가를 모두 초가를 얹어 옛 조선시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렇게 조성된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25년여가 지난 지금, 연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남도지방의 대표적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게 돼 성공한 민속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낙안읍성을 방문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초가집이 인상적이었고 선조들의 서민적 삶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의견들을 내 놓고 있다. 이는 낙안읍성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낙안읍성은 일반 서민들이 살았다는 농촌이나 산촌이 아니다. 낙안읍성은 군수가 기거하면서 집무를 봤던 낙안군이라는 고을의 치소며, 사적지 제302호 국가문화재이기에 역사적 의미와 교육적 내용을 왜곡 없이 담아 '지방관청'과 '군수, 양반' 이라는 이미지를 방문객들에게 충실히 전달해 줘야 했다.

 

지금까지 이곳을 방문했던 수많은 관람객들은 '지방관청', '군수'라는 단어 대신 '초가집'과 '서민'이라는 두 단어만을 떠올리게 됐다. 이는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던 25년여 동안 시 행정당국과 지역주민들이 '초가집'과 '서민'이라는 두 단어만을 집중적으로 관광객들에게 홍보한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왜곡된 낙안읍성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그럼 낙안읍성의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 조선시대로 맞춰놓는다면 성내 절반 이상은 동헌, 내아, 육방관아 등 기와 건물이 차지하고 있고 구성 인원 또한, 행정업무를 봤던 사람들과 치안, 방어를 담당했을 사람들, 군수나 아전들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성내 인구의 약 10%에 육박하는 15명의 관기(궁중 또는 관청에 속하여 가무(歌舞), 기악(技樂) 따위를 하던 기생)가 있었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낙안읍성이 '초가집'과 '서민'을 떠올리는 장소는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왜 관람객들이 그동안 국가문화재인 사적지에 와서 '초가집'과 '서민'만 떠올리면서 왜곡된 정보를 습득하고 돌아가게 됐을까? 가장 큰 잘못은 복원과 알림을 맡은 시 행정당국에 있다. 한 마디로 민속마을을 강조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어설픈 복원과 가파른 진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관광객이 많이 오면 좋고 그들이 그냥 편안하게 시골 고향집 왔다는 기분 느끼면 그만이지"라고 하는 시 행정당국이나 지역주민이 있다면 그건 스스로 낙안읍성이 갖는 문화재 본연의 가치를 포기하고, 낙안군의 치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로 일반 상업적 민속촌에서나 가능한 생각이다.

 

현재의 낙안읍성에는 군수가 집무를 보던 동헌이나 기거했을 객사에 화장실이 있을까 없을까? 15명이나 있었다던 관기가 기거하고 공연했을 기방청을 본적이 있는가? 낙안읍성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외부의 적을 막아내기 위해 사용되던 무기를 보관했던 무기고가 옥사에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없다. 지역 양반들이 시와 풍류를 즐겼다는 빙허루, 향사당, 기방청과 무기고 등의 건물은 복원되지 않았다. 복원했다는 동헌이나 객사에 화장실조차 없으니 엉터리 복원은 여느 가건물 민속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 것들이 결국 25년 여 동안 관람객들에게 "낙안읍성은 사적지가 아닌 민속촌입니다"라고 시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국가문화재 사적지 제302호 낙안읍성은 하루속히 부속 건물 등을 복원해서 그 모양과 형태를 바로잡아 지금껏 관광객들에게 각인시켰던 '초가집과 서민들의 삶이 살아있는 곳'을 '지방행정 관청과 양반들의 삶이 있었던 곳'으로 변경해야만 한다. 그것은 역사적 차원에서도, 교육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기방청을 복원해 기녀들의 생활상도 보여주고, 향사당을 복원해 양반들의 모습도 재현하고, 빙허루를 복원해 양반들의 질펀한 삶도 보여줘야 한다. 물론 '성곽은 어떻게 지켰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무기고(군기고)의 복원도 당연한 일이다.

 

빙허루와 기방청이 퇴폐적인 양반문화의 장소였다고 복원에 주저하거나, 그 시대의 음성적 단면을 지워버릴 생각으로 눈을 감고 있다면, "한국은 역사왜곡을 밥 먹듯이 하는구나"라고 외국인들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다. 우리부터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것이 역사를 다루는 옳은 자세다.

 

물론 조성초기부터 조선시대 행정관청 본래의 형태나 삶의 모습대로 복원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했다면, 지금 주민들의 소득과 직결되는 관광객이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득이 적다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복원했다면 이곳이 의미 없는 가건물의 드라마세트장이나 여느 민속촌이 아닌 국가문화재인 사적지라는 자부심만은 컸을 것이다.

 

사실 상식선에서 생각해 봐도 지방 행정관청인 낙안읍성(둘레가 1410미터의 그리 크지 않은 성곽)에 한 고을의 수령과 보필하던 행정인원, 지방행정소사를 논의했던 양반층, 그리고 그 수족이 됐던 노비와 하층민 등이 엄격한 신분사회 속에서 공존했다면, 그 문화와 생활의 중심이 서민이 아닌 양반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육방관아 등의 복원 없이 낙안읍성을 '조선시대 서민의 삶이 그대로 살아있는 아름다운 민속마을'이라고 왜곡 선전하는 것이 맞는다고 주장한다면, 필자는 관람객들이 멀리 이곳 남도 땅까지 오지 말고 가까운 민속촌을 찾거나 시골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 것이 교육적 차원에서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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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서민적 마을? 개념 바꿔야 정통성 이어가 낙안읍성은 서민적 마을? 개념 바꿔야 정통성 이어가 ⓒ 서정일

▲ 낙안읍성은 서민적 마을? 개념 바꿔야 정통성 이어가 낙안읍성은 서민적 마을? 개념 바꿔야 정통성 이어가 ⓒ 서정일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09-006]예고(동영상): 순천시 외서면, 이렇게 작은 곳에서 전국 딸기묘 생산 1위?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2009.07.29 16:52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09-006]예고(동영상): 순천시 외서면, 이렇게 작은 곳에서 전국 딸기묘 생산 1위?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낙안군 #남도TV #스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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