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의 중도실용·친서민 행보는 남한식 우상화놀음

정책의 가치나 효용보다는 피상적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대중 지지 획득

등록 2009.09.08 12:34수정 2009.09.0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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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통령, 떡복이 이벤트 등 친서민 행보로 지지율 상승

작년 촛불 정국 때 10%대까지 떨어졌던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최근 중도실용, 친서민 정책을 내세우면서 40%대까지 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대한 재정지출을 통해 경기가 일부 살아나고 재래시장, 장애인시설 방문 등을 통한 이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 개혁적 이미지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의 총리 지명 등이 중도층의 지지를 얻은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민노당․진보신당 등 야당은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친서민 정책은 대중영합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민생현장을 가는 척하지만 제대로 된 장애인, 재래시장 정책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장애인을 걱정한다면 4대강 사업 예산에서 1조 원이라도 깎으면 장애인복지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야당의 비판과 반발에도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올 10월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 조기 레임덕에 빠질 수밖에 없어 현재의 국정 기조를 밀어붙이고 있다. 청와대의 적극적인 공세 앞에 야당은 마땅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수세국면에 처해 있다. 경제가 회복 기미가 있다고는 하지만 실질임금이 삭감되고 생활물가는 여전히 오르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에서는 겉으로나마 이 대통령의 달라진 것처럼 보여 국민이 호감을 느낀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김 전 대통령을 국장을 통해 예우해줌으로써 국민이 이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20% 초반에 머물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이후 급상승한 것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악조건에도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한 것은 민생현장 방문 같은 이미지 정치의 산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본질적인 변화는 없으면서도 모든 계층의 행복을 약속하는 립서비스와 집착에 가까운 언론플레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부자 감세'나 '대북문제' 등 자신의 지지세력을 외면할 수 없는 한계와 4대강사업으로 인한 복지축소, 지역공약 무산 등으로 MB 정부의 실체가 드러나면 지지율은 반 토막 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MB 정부 들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이미지 정치는 현대정치의 큰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정치는 정책적 대결과 이념의 문제보다는 단순하고 감성적 이미지를 통해 국정을 풀어가려는 유혹에 빠진다. 정책의 가치나 효용보다는 피상적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개혁'의 화신이라는 조작된 이미지로 총선압승

그 대표적인 예는 2005년 실시된 일본총선이다. 당시 총선은 철저히 고이즈미에 의한 고이즈미의 선거였다. 거품경제가 몰락하고 10년 장기불황에서 허덕였던 일본 대중들은 기존 정치질서를 바꾸어야 한다는 심정적 동의를 하고 강력한 개혁을 약속하는 고이즈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일본국민은 그가 지향하는 80년대 레이건과 대처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따지지도 묻지도 않은 채 '개혁'의 화신이라는 조작된 이미지에 표를 던진 것이다.

2001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고이즈미는 소신발언 등을 통해 그만의 캐릭터를 구축했고 총리가 되자 소위 개혁에 관한 이슈를 생산해 냈다. '우정국 민영화'에서부터 도로공단 민영화, 재정 적자의 축소, 공공지출 및 지방 교부금의 축소라는 이슈제기를 통해 자민당 내 기득권세력과 대립각을 세웠다. 그런 긴장관계는 국민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는 2005년 총선 때 우정국 민영화 반대파 의원들 전원에 대한 표적공천을 통해 자민당 내 반대세력을 퇴출했고 돌풍의 여파는 야당인 민주당의 참패를 불러왔다. 당시 민주당은 '경기대책'이나 '연금정책', '아시아 중심외교', '교육과 의료', '저출산' 등의 이슈를 '정권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정책적 비전을 제시했고 시민단체 역시 이미지 정치에 현혹되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우정국 민영화'가 일본 개조와 개혁의 전부인 것처럼 이슈화시킨 고이즈미의 치밀한 정치공세에 밀리고 말았다. 즉 우정국 민영화에 찬성하면 개혁, 반대하면 수구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총선정국을 강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국민은 고이즈미의 얼굴만 보고 자신들이 찍어야 할 후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가 공천한 후보자에 몰표를 던졌다. 그의 신자유주의적 공약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젊은 층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서부활극이나 무협지에서 나올만한 고이즈미식 드라마에 온 국민이 놀아나면서 인터넷 후보등록으로 당선된 스기무라 다 이조 같은 의원은 "의원에 당선되었으니 요정에 가보고 싶다"라든지 "세비가 2천5백만 엔이라니 BMW를 사야겠다"라는 상식 이하의 발언을 해 국민의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고이즈미는 집권 후 우정성 등 정부산하 법인 163개 중 136개를 폐지하거나 민영화 또는 독립법인화시켰고 관이 주도하던 행정서비스를 민․ 관 입찰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직업소개소와 교도소 등 관업무 일부는 아예 민간에 이양하는 등 사회서비스분야의 미국화를 꾀했다. 또한, 도쿄를 뉴욕, 런던과 같은 선진국의 대도시보다 더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지 못한다면 일본의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도권 규제정책을 폐지했다.

이와 함께 시간제 근로와 파견근로제 확대 등 노동자보다는 기업이익에 충실한 노동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 결과 종신고용-연공서열로 대표되는 일본형 고용 구조가 크게 악화되어 전체 취업자 중 정규직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985년 83.6%에서 2000년에는 74.0%, 2008년 말에는 62.3%까지 하락했다. 비정규직이 37.7%까지 상승한 것이다. 이 같은 통계는 실업률이 유럽 최고로 최악이라는 독일의 30.3%보다 높은 수준이다.

고이즈미 개혁의 결과 일본경제는 단기간 반짝 상승하는 듯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대기업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국민은 빈부 격차확대와 농촌붕괴, 실업증가와 비정규직 양산 등의 부작용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으로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고이즈미 체제는 무너졌고 자민당은 역사적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현재 이명박 정권도 이미 파탄이 난 고이즈미 개혁을 따라 하고 있다. 선진화라는 후진형 정치용어를 동원해 촛불 정국으로 미뤄진 가스․수도․의료민영화를 시도하고 있고 자민당식 장기집권을 위해 방송장악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검찰․경찰․국세청․KBS 이사회 불법장악을 통해 정연주 KBS사장을 몰아내고도 방송장악에 뜻이 없다는 손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의 이미지 정치는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일본국민이 고이즈미의 활극에 손뼉을 친 것처럼 한국국민도 이 대통령의 재래시장 할머니 끌어안기와 떡볶이 먹기 소동에 울고 웃고 있다. 청와대 중도 실용․서민이라는 국정 기조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TV드라마와 같은 오락거리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정치라는 삼류 드라마의 폐해는 드라마가 끝나고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손뼉을 쳤던 시청자(국민)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 이미지 정치에 동참하며 주체성 상실하는 대중들

대중들이 마취상태에서 집권자들이 펼쳐놓은 막장 드라마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AD 8~9세기경에 진행되었던 비잔틴 제국의 성상 논쟁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성상 논쟁은 1차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는 8세기 초 비잔틴 황제 레오 3세의 명령으로 시작되어 그의 손자 레오 4세 때까지 35년간 이루어졌고, 2차 역시 9세기 초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역시 약 30년간 진행되었다.

이 당시 논란의 핵심이었던 성상(Image 또는 Icon)은 주로 그리스도나 마리아, 사도들, 천사들과 성인들의 그림이나 조각들로 이루어졌으며 비잔틴 내에서는 그 앞에 향을 피우고 그것에 입맞춤하기도 했다. 서로마지역처럼 일반적 상징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의 초상이나 재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레오 3세는 구약성서에 언급된 '우상숭배금지'를 어겼다는 이유로 성상 숭배를 금지했다. 초기에는 성상(Image)에 대한 과도한 숭배로 우상(Idol)으로 변질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정도에서 그것들을 신자들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치우라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성상 옹호자들은 성상(Icon)은 '영원성의 창문'이며 가시적인 형태로 구체화한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상징'이기에 그 자체로도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자신의 정책이 저항에 부딪힌 레오 3세는 공권력을 동원해 성상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반대하는 이슬람 세력과 국경을 맞대는 소아시아와 일부 성직자, 지식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조각이나 그림문화가 발달한 그리스 등 제국내 유럽지역의 반발이 거셌다. 신앙심이 깊었던 레오 3세가 제국민들의 반발에도 성상 파괴(iconoclasm)를 밀어붙인 것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작용했다.

비잔틴제국과 경쟁을 하고 있던 과거 서로마제국 영토 내의 로마교회는 게르만족을 선교하기 위해 성상을 이용했다. 기독교에 대해 생소한 게르만족에게 성상을 통한 포교활동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8세기 중반 독일 동북부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의 포교가 완료될 정도였다. 서로마에서 독자적 세력을 확보한 로마교회는 비잔틴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의 왕권을 인정하면서 정치․군사적 후원을 받았다.

서로마제국 내의 정치군사적 변화와 성상 숭배를 인정하는 로마교회의 영향력을 우려한 레오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 파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탄압, 처형하였으나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787년 레오 4세의 황후이자 비잔틴의 실력자인 이레네가 주재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성상숭배의 정통성이 재확인되었다. 그 후에도 제2차 성상 금지령이 내려져 843년까지 성상파괴가 일어나가도 했지만 반대입장이 강했던 소아시아지역에서도 열기가 가라앉자 성상 파괴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성상 파괴는 로마가톨릭과 갈등관계에 있었던 영국에서도 있었다. 헨리 8세 시절인 16세기 중반 캔터베리 대주교를 맡고 있었던 크롬웰이 성모상을 불태우도록 한 것이다. 이때 강경파는 완전한 성상 파괴를 염두에 두었던 반면 온건파는 성상에 대한 숭배는 반대하지만,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투옥과 고문, 처형이라는 제국의 강력한 탄압, 우상숭배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에도 비잔틴 제국 백성이 성상 숭배를 지지한 것은 보이지 않은 신과 죽은 성인들의 물화(物化)를 통해 복을 기원하고 영원성에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거대한 성당의 제단에 모셔진 것보다는 부속건물이나 마을 또는 자신들의 집에 모셔놓고 인격화시켰고 이들 물질적 대상들은 영적 진리와 과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개인의 신앙을 국가가 개입하는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비잔틴의 대중들을 통해 발전한 성상 숭배행위는 근원적 종교행위로서 그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성상 파괴자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기복 이상의 것을 넘지 못하는 우상숭배라는 부정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성상화(Icon)는 러시아에 영향을 주면서 15세기 안드레이 류블로프라는 위대한 성상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기복성과 비주체적 신앙을 대변하는 성상숭배는 결국 동방정교회의 신앙을 체제지향적인 수동적이고 폐쇄적 차원에 머물게 했다. 그 결과 1917년 소비에트 혁명 당시 러시아정교회는 혁명 군중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엄청난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현대의 대중들 역시 이미지 정치에 현혹되어 집권자들과 주변인물들이 조장하는 우상(Idol) 만들기에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주체성을 상실한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그들은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신화로 무장한 이명박이라는 새로운 선동가(Idol)에게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허상은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다. 아이콘(Icon)은 그나마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지만 우상들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남발하고 즉물적인 환각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 환상이 깨지면 허탈감과 분노로 인해 우상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정치는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라크 전쟁기간 동안 보도사진과 TV 화면을 통해 전투현장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전쟁을 직접 겪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비켜갔던 것처럼 이미지 정치 역시 대중들의 고통과 무관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하며 유권자들을 기만한다. 북한체제가 시대별로 이슈를 창출해 김일성․김정일을 우상화시키면서 정권을 유지했던 것처럼 이명박 정권도 장기집권을 위해 재래시장 할머니 껴안기와 떡볶이 이벤트라는 유치한 현장지도정치를 통해 새로운 우상화 놀음을 하고 있다.

많은 비판에도 이미지 정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중들은 개선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절망감으로 차라리 그것이 주는 스펙터클한 재미에 빠져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삶을 지켜본 이명박 대통령 역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대중들에게 던져줄 먹잇감을 만들려고 분주할 것이다. 청와대의 중도 실용, 친 서민 정책은 내년 지방선거까지 전개될 것이 분명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강남 부자를 위한 이 대통령의 원초적 본능이 분출될 때 대중들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때는 속았다고 분노해도 버스는 이미 지나간 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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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이미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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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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