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 벽화 시베리아 여인, 날 닮았다고?

[시베리아 이별여행⑨] 시베리아에서 만나는 한국

등록 2013.06.25 12:16수정 2013.07.0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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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시베리아인을 묘사한 이르쿠츠크의 벽화. 나와 닮았다는 S의 말에 앞에 서 보았다. ⓒ 예주연


"통일되면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대!?"

내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바로 이어 들은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대다수 한국인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꿈이다. 인천공항에만 가면 하루에 수백 개의 비행기가 세계 곳곳을 이어주는 마당에, 유럽까지 가는 10시간 남짓한 비행시간도 지루해 죽겠는 마당에, 굳이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동양인인 내가 서양인인 S와 이 기차를 타고 싶었던 이유

독일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작가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영혼 없는 작가>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작가는 그래서인지 1979년 19세의 나이로 비행기 대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에 갔다. 그리고 이 경험은 작가에게 "동양과 서양을 대립하는 세계가 아닌, 서로 겹치는 큰 경계영역을 지는 세계로 인식하게 하였다"고 한다. 바로 동양인인 내가 서양인인 S와 이 기차를 타고 함께 여행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국인인 내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꿈꾸게 한 것은 앞서 말한 반도와 북한이라는 지리적, 정치적 요인으로 섬 아닌 섬에 살게 되면서 품게 된 대륙과 이어지고 싶다는 열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철도가 지나는 만주와 연해주는 우리 역사와 아주 관련이 깊은 곳이다. 고구려와 발해사를 공부할 때, 작가라는 꿈을 키워준 <토지>와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을 읽을 때 배경으로 나오던 곳. 하지만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그래서 낯설면서도 묘한 향수를 일으키는 곳이다.

100여 년 전 이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간 한국인이 있다. 1907년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들이다.

어릴 적 나는 일제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배우면서 다른 나라들은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던 걸까 하고 궁금해하곤 했다. 세상은 어떤 객관적 정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던 때였다. 이것은 단순히 인도주의를 향한 호소나 외세에 의존하려는 나약함이 아니다.

조선의 쇄국 정책에도 억지로 문을 열어 앞다퉈 조약을 체결한 서구 나라들이 스스로 명시한 대로 조선과 그들 국가는 우방국으로서 상대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각각 필리핀과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 등은 일본이 자신의 아시아 내 식민지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 점령도 묵인하기로 밀약한다.

헤이그 특사들 역시 소수 언론에서만 취재해갈 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기에 회의장 입장마저 거부당한 채 돌아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준은 자결하기까지 이르렀다.

일제강점기는 조선 말기부터 시작된 조선인의 만주와 연해주로의 이주 수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일제의 수탈과 압제를 피해 많은 민중과 독립군들이 일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지역은 조선, 중국, 러시아의 변방으로 세 국가의 국민은 거친 땅을 개간해 자유롭게 섞여 살았다. 하지만 조선을 합병한 일본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멋대로 중국과 러시아와 협상하면서, 조선인이 살고 있던 조선 땅의 많은 부분은 중국과 러시아에 넘어가게 된다.

지금의 북한과 맞닿아 있는 곳에 사는 많은 수의 조선인은 언제든 독립이나 조선으로의 흡수를 요구할 수 있는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국적상 일본인이었기에 아시아에 대한 야욕을 더욱 키우고 있는 일본에 분쟁과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정부는 러시아 내전 당시 서방 제국주의에 반한다는 공동의식으로 그들을 도왔으며, 마찬가지로 그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공산주의 혁명을 도모하던 조선 독립군에게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워 2500여 명을 처형한다. 그리고 이어 1937년에는 18만여 명의 민중들을 중앙아시아 각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통보에서부터 출발까지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거의 맨몸으로 정들인 땅을 떠나야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주 노선으로 기차의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한 달여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기차는 벽의 판자 틈이 벌어져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상태였다. 화장실이나 먹을거리가 제공되지 않아 기차가 설 때마다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그마저도 기차가 언제 떠날지 몰라 여의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과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내린 곳도 허허벌판에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되었다.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겨우 정착하자 이번에는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했다.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타민족인 고려인들은 또다시 쫓겨나야 했다. 끝나지 않는 디아스포라이다(이상은 '고려인 돕기 운동 본부' 홈페이지 www.koreis.com에서 참조했다. 고려인은 현지에서 재러 동포를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 '초코파이'는 거스름돈 대신 주는 보편적인 간식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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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기차 여행의 필수품인 '도시락' 라면과 '초코파이', 한국계 록가수 빅토르최의 추모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한국어 표지판을 그대로 달고 달리는 러시아에 수출된 한국산 중고버스. ⓒ 예주연


이렇게 한민족의 한이 서린, 그러나 지금은 난방도 잘 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칸이 있으며 즉석조리식품과 간식거리를 실은 카트가 지나다니는 기차를 타고 있는 감회가 남다르다.

승객들이 그 카트를 세우고 사 먹는 주식은 '도시락'이라는 이름의 한국 회사가 만든 컵라면이었다. 한국 과자도 인기가 많았다. 나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S 혼자 식당 칸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온 적이 있다.

자리에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초코파이'가 들려져 있었다. 40루블짜리 커피를 마시고 50루블을 내자 10루블이 없다며 대신 거슬러 준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경우는 유럽에서도 종종 있는 경우로 거스름돈 대신 주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잘 먹는 보편적인 간식거리였다. 러시아에서 '초코파이'의 위치가 그 정도였던 것이다.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먹으며 도착한 바이칼 호수에는 우리의 서낭당 오방색 천을 닮은 타룽초와 룽다가 바람에 휘날리며 나를 맞아주었다.

바이칼 호수는 민족의 시원이라 일컬어진다. 아직 학계에선 의견이 나뉘지만 많은 학자들이 한국인을 몽골족과 같은 계통으로 보고 있으며 몽골족의 문명 발원지가 바로 바이칼 호수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서 만난 한국, 그것 자체로 보고자 노력

실제로 그곳 부랴트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무속신앙을 떠올리는 샤머니즘을 믿고 있었다. 단군신화를 닮은 게세르 신화, <심청전>과 <선녀와 나무꾼>을 닮은 민담 등 공통점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북방 강조와 몽골과의 연결 시도 이면에는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있을 수 있다. 약소국으로서의 서러움을 강대했던 고대사나 칭기즈 칸의 대륙 정복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한국과 잇고자 하는 계획 뒤에도 단순한 여행자의 낭만 외에 가스관 등 자원 개발, 운반에 따른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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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색천을 감은 서낭당을 떠올리는 바이칼 호숫가의 한 나무 ⓒ 예주연


열강의 이해 다툼과 일본 역사 왜곡, 중국 동북공정의 피해자인 우리가 우리 입맛에 맞춰 고대사를 해석하거나 약자의 착취에 의한 풍요를 누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시베리아에서 만난 한국에 반가워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그것 자체로 보고자 노력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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