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시베리아 이별여행⑧]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 下

등록 2013.06.21 11:07수정 2013.07.02 15:59
0
원고료로 응원
지난 '시베리아 이별여행' ①·③에서 언급했던 중학생 아이들이 옴스크에서 내린 새벽. 그 자리에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떼지어 타기 시작했다. 아시아계인 그들은 옷차림이 초라했고, 실내에 들어와 그 옷을 벗자 땀 냄새·발 냄새가 진동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음 날, 그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모델 안드레이와 군인 옥토가 아침부터 보드카를 들고 S와 나를 찾았다. 우리는 안주로 러시아식 소시지 깔바사를 꺼냈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칼은 날이 무뎌졌는지 소시지가 잘 썰리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맞은 편 아시아계 남자들에게서 칼과 모자란 보드카 잔을 둘 빌렸다. 그렇게 작은 파티가 시작됐다. 하지만 술에 약한 나는 보드카 몇 모금을 맛보다 금방 어지러워져 2층 내 침대에 혼자 누우러 올라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드레이와 옥토도 술에 취해 각자 자기 자리에 가 뻗었는지 시끌벅적한 소리는 잠잠해졌다. 누운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맞은 편 남자가 자리에 매트를 깔아놓고 창문 쪽을 향해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그를 둘러싸고 후광을 만들어 무척 아름답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대판 '카라반', 시베리아 횡단 열차

a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의 시베리아 ⓒ 예주연


잠시 뒤 그의 기도가 끝나고 나도 2층 침대에서 내려와 우리는 얘기를 나누게 됐다. 일행보다 나이가 있어 중년으로 보이는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건설일을 하러 간다고 했다. 그는 손마디가 굵고 거칠었지만 때맞춰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안경을 끼고 책을 들여다보는 등 지적인 인상을 풍겼다.

젊은 일행들은 각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식사 때가 되면 먹거리를 준비해 그의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조용조용히 의논했다. 오랜 경험과 소비에트 시절 익혔을 러시아어로 러시아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책임지며 그룹을 이끌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서는 연륜이,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에게서는 그를 향한 존경이 느껴졌다.

그런 그들의 성실한 삶과 힘든 노동을 앞두고 이동하면서의 잠깐의 휴식을 지켜보며 나는 첫인상만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꺼려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는 무슬림인 그들에게서 칼과 잔을 빌려 돼지고기 기름과 술을 묻혔다는 사실도 미안했다. 그것들을 깨끗이 씻어 돌려줬을 때 중년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미소로 마침 먹고 있던 전통 빵을 S와 나에게 나눠줬다. 약간 시큼한 게 이제껏 먹던 빵과 달랐지만 참 맛있었다.


그 빵을 씹으며 나는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 노동자와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현대판 카라반 같다고 생각을 했다. 먼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며 동서 교역에 큰 역할을 했던 아랍 상인들의 카라반처럼 말이다.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남자

낮 시간 동안 S와 나는 자리에 나란히 앉아 각자 일을 했다. 그러다 지치면 고개를 들어 창밖이나 기차 안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바로 맞은편 사람을 빤히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시선은 대각선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향하게 마련이었다.

기차에는 혼자 여행하는 사람도 물론 많아서, 우리 대각선 자리의 젊은 남자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 공간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서로 친해지는 다른 승객들과 달리 그는 온종일 잠만 자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S와 나에게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노선이 표시된 커다란 지도가 있었다. 첫날 무심코 이 지도를 펼쳤다가 우리는 이 지도가 우리와 사람들을 이어주는 마법의 물건이란 걸 알게 됐다. 서로 친해지고 싶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눈치만 보던 주변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긴 말 할 것 없이 자신이 온 곳, 가는 곳을 가리키며 소통을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지도부터 꺼내 펼쳤다.

수상한 남자의 웃음

a

우리의 기차 여행을 함께한 지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해로 가는 배 안에서도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 예주연


우리는 대각선 남자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먼저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가 침대에서 내려오길 기다려 지도를 들고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블라디보스토크·한국을 차례로 손으로 짚었다. 이탈리아에서 왔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계속 여행을 하고 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갈 것이라는 뜻이었다.

비록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있지만 대개의 러시아 사람들은 용무 상 일정 구간에서 타고 내릴 뿐 전 구간을 이어서 타는 경우는 드물었다. 거기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양옆으로 한참을 더 뻗어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우리의 여정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남자는 우리가 지도에서 손을 뗄 때까지 '그래서 뭐'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멀뚱히 보고 있기만 했다. 우리 지도에 손을 가져다 대지 않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몇 번 더 시도해봐도 마찬가지 반응이기에 남자가 우리를 싫어하나 보다 생각하고 우리 자리에 돌아왔을 때였다. 남자가 마침 지나가는 카트를 붙잡고 과자 두 봉지를 사더니 우리에게 한 봉지를 건넸다.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만의 우정 표현법이었다.

그런 그가 웃는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기차가 정차한 사이 잠시 밖에 나갔다 와보니 그가 맞은 편에 앉은 낯선 사람과 서로의 여권을 바꿔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탔다고만, 그 사람과는 성향이 잘 맞나보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하고 다시 보니 그의 맞은 편 자리에는 정차하기 전부터 있던 사람이 그대로 앉아있었고 그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속 밖에 있어서 대각선 남자가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S는 내 말을 믿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남자는 분잡한 정차 시간을 골라 접선을 한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여권을 바꿔 본 건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테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의 여로를 밝힐 수 없었구나. 적의 눈에서 우리를 보호하고자 섣불리 친한 척을 할 수도 없었고…. S가 자신이 하던 일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혼자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아파트 놀이터 삼킨 파도... 강원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
  3. 3 나의 60대에는 그 무엇보다 이걸 원한다
  4. 4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 어머어마하구나
  5. 5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